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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Jeongseon Oct 03. 2024

창작자를 보호하지 않는 사회는 위험하다

오랜만에 본가에 들렀다. 쨍하고 내리쬐는 따가운 햇살, 건조해서 피부에 닿는 감촉이 날카롭게 뜨거운 볕의 기운을 느끼며 공항을 나섰다. 한 나라 안, 이 좁은 땅덩이에서도 어느 곳에 서 있는가에 따라 확연히 차이 나는 볕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아무리 쾌청하고 투명하게 맑은 날에도 제주의 햇살은 물기를 담고 있어서 부드럽고 촉촉했다. 그렇다 보니 베는 듯한 감촉의 햇살은 내겐 육지에 온 상황을 몸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으로 작동했다. 겨울바람도 그랬다. 거칠고 강한 바람이 거인의 큰 손처럼 내 몸을 밀어내듯 떠밀려 걸을 때도 제주의 바람은 눅눅하고 무겁고 두터웠다. 그러다 육지의 공항을 나서면 그때 칼날같이 건조하고 날카로운 바람은, 더운 시절 햇살을 대신하듯 베어내듯 불어댔다. 찌르는 느낌과 베는 느낌으로 다르게 세분하면서 날카로운 감각이라는 점으로 묶어둘 수 있었다.


몸으로 기억하는 다채로운 감각은 세상을 바라볼 때 늘채고 푸져서 더 많은 정보를 내게 입력한다. 주먹만 한 토마토와 방울토마토와 그 중간 크기의 토마토는 맛 이전에 크기로 다름을 알려주지만, 먹는 방법에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보인다. 셋 모두 칼로 더 작게 잘라서 먹을 수도 있지만 수돗물에 쓱 씻어 도구 없이 먹을 때, 한입에 베어 물거나 한입에 통째로 넣거나 조심조심 반을 베어 물거나 해야 한다. 하지만 큰 토마토와 달리 중간 토마토는 방울토마토같이 표면이 질겨서 잘못 베어 물면 즙이 사방으로 튀기 십상이다. 이럴 때는 조심조심 아주 작게 베어 물어 즙을 쪽 빨아먹고 난 후 씹으면 즙이 튀지 않게 먹을 수 있다. 즙을 흡입하고 과육을 즐길 수 있어서, 어떨 때는 방울토마토처럼 입 안에 전부 넣고 터질 듯한 감각을 즐길 수 있어서, 때로는 얇게 잘라 얇게 뜬 치즈와 먹거나 빵에 넣어 먹거나 파스타에 넣어 먹거나 달걀 토마토 볶음을 해 먹거나 다양하게 즐길 수 있어서 중간 토마토를 가장 좋아하게 됐다. 같은 종목으로 묶이는 무엇의 세분화에서조차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풍성한 감각으로 세상의 일면을 넓혀준다. 나는 이런 경험이 그렇게 좋았다.


그렇다 보니 예술의 다양한 장르를 즐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른다. 여기저기 장르 가리잖고 좋아하는 게 많아서 오히려 전문적으로, 아니 아마추어만큼의 지식도 가지지 못했다. 해석을 위한 도구의 언어는 언제나 가난했고 해서 누군가 음악이나 영화, 미술 감상을 나누는 모습을 보면 공부 좀 하자고 다짐하면서도-이 역시 내가 세상을 표현하는 방법의 다채로움을 위해서- 공부한다고 해도 그 언어를 잘 사용하지도 못하는 편이었다. 이론적 언어들은 주먹 쥐면 삐져나가고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에 남은 얼마 남지 않은 진흙 덩이처럼 사용할수록 초라해질 뿐이었다. 전문성은 처음부터 가지 않은 길이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아마추어 곁가지도 닿지 못했다. 내 언어로 만드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표현의 방법으로서의 감각 학습은 긴 폭으로 잡아두고 받아들이는 감각의 방향과 방법은 더 잦게 열어놓으려 했다. 번져나가고 뻗어나가 안으로 흡수하는 기쁨은 온전한 현재였고 그것을 언어로 만들거나 기호처럼 나열해 놓거나 기록을 통해 다시 떠오르는 감각의 기억은 찰랑거리다 넘실거리며 넘치는 물 같았다.


몸의 감각을 벼려서 세상을 받아들이고 자신만의 지식과 경험을 댕돌같이 직조해 놓은 결과물을, 경건한 마음으로 감사히 감각하게 되는 기쁨 또한 종요롭다. 이는 원래의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에 타인의 감각이 더해져 다시 재구성돼 다른 감각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받아 들 수 있는 정보의 양과 질은 자꾸만 넓어지고 깊어지고 무드럭진다. 가령 예술을 보는 것이 이미 해석된 세상이라면 그것을 해석한 평론가들의 글 역시 또다시 해석된 세상이기 때문에 감각은 감각을 박작거리게 한다. 세상은 수천억의 세상으로 분화된다.


소위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산과 소유권만큼 중요한 권리가 있겠냐만 그 이전에 감각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도 타인의 감각된 결과를 함부로 취급하는 사회는 천박하고 불쾌하다. 내가 감각할 수 있는 범위가 늘어난 만큼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고 정확하게 경위를 적시해야 한다. 그런데 소유권이 중요한 사회에서 사람들 저마다의 고유한 감각을 통과해 만들어진 어떤 형식의 창작이든, 패대기치고 훔치고 빼앗는 무례한 행위가 일반화되어 있는 작금의 현실은 왜 자본주의적이지 못한가. 법률조차 빈약하여 다양한 약자를 포용하지 못하고 있고 법 적용이 차별적이라면 그 사회의 문화는 얼마나 빈한하고 얄팍한 것인가. 이러한 무례에 지나치게 너그러우며 기계적 중립 기어 넣기를 즐기는 사람들의 비겁함은 얼마나 추한가. 범법의 영역으로 강제하기 이전에 일상의 윤리로 기능하고 있는, 품격 있는 사회를 바란다. 그 이전에 이러한 범법과 무례는 당연히 정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것이 우리나라가 표방하는 ‘자본주의’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무너진다면 사회주의자 때문이 아니라 거대한 자본이 저지르는 범법 때문일 것이다. 자본주의의 근간을 흔들어대는 자본이라는 아이러니, 붕괴의 현장만큼 처참한 감각이다.





이 글은 "헤드라인제주"  <한정선의 작은사람 프리즘>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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