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75주년에 돌아본 기적 같은 작전
올해가 '인천상륙작전' 75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해 지난 9월 15일 대대적인 행사가 열렸다. 특히 1950년 당시 인천시청이었던 구청에선, 북한군이 물러가고 인천을 되찾은 수복식이 재연됐다.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7개 국가 가운데 6개 국가에서 사절단을 보내 함께 했다. 또한 상륙작전을 지휘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아들 아서 맥아더 4세가 처음으로 친서를 보내기도 했다. 그는 "인천상륙작전의 결실은 대한민국의 자유와 75년에 이르는 번영이었다"라고 전했다.
인천상륙작전은 우리나라의 운명을 좌우한 매우 중대한 사건이었다. 알다시피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인해 한국군은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렸다. 조만간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될 수 있는 풍전등화의 위기 상황이었다. 이때 맥아더가 전세를 일거에 뒤집어버리는 획기적인 작전, 인천상륙작전을 단행했다.
해당 작전이 현실화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상륙 지점을 선정하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세 곳이 후보지로 떠올랐다. 인천, 군산, 주문진이다. 대부분의 참모들은 군산을 선호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상륙 조건이 양호하고, 낙동강 전선에서 올라온 병력과 협조하기가 용이하다는 판단이었다. 그런데 맥아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천을 고집했다. 미 합동참모본부와 해군본부의 격렬한 반대가 뒤따랐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큰 조수간만의 차가 우선적으로 꼽혔다. 만약 함선이 밀물일 때 상륙하면, 다음 밀물이 올 때까지 좌초돼 북한군의 공격에 쉽게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 밀물이 아닐 때 상륙하면, 지상군이 수백 미터를 엄폐물 없이 질주해야 했다. 썰물이면 나타나는 갯벌도 문제시 됐다. 이는 수백 미터 이상의 폭과 길이를 가져 보병과 차량의 통행을 곤란하게 만들 수 있었다. 상륙지 주변의 돌로 쌓은 방파제와 축대도 지적됐다. 이는 높이가 상당했기에 방어 진영에는 절대적 이점을, 공격 진영에는 불리함을 제공했다. 만조 시 상륙 함정들이 비좁은 단일수로에 밀집하게 될 위험성도 제기됐다. 이렇게 되면 적군 해안포의 손쉬운 먹잇감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 모든 것들에 근거해 해군사령관인 찰스 터너 조이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확률을 '5000분의 1' 정도로 보았다.
그럼에도 최종적으로 인천이 상륙지로 결정됐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북한군의 보급로를 효과적으로 절단할 수 있고 서울로도 신속히 진격할 수 있었다. 군산 등은 이 같은 이점들이 부재했으며 적군을 포위할 수도 없었다. 둘째, 인천에서의 북한군 전력이 매우 취약했다. 북한군 지휘부는 유엔군이 인천보다는 다른 곳으로 상륙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예측했다. (린뱌오와 저우언라이 등 중국의 핵심 전략가들은 인천을 유력한 상륙지로 판단했다.) 이에 따라 인천에 비교적 적은 수의 병력을 배치했다. 그나마 있었던 병력을 낙동강 전선으로 보내기도 했다. 맥아더는 인천에 상륙하기 힘든 점들이, 역설적으로 북한군의 오판을 유도해 인천을 최적의 상륙지로 만든다고 설득했다. 그의 끈질긴 노력으로 미 합참은 '크로마이트 계획'을 승인했다.
이제 유엔군은 치밀한 사전 정지작업에 들어갔다. 먼저 정보들을 수집했다. 한국군 첩보부대가 인천항 주변에 있는 영흥도 등에 잠입해 북한군의 병력 배치, 장비, 해안가에 설치된 기뢰의 위치 등을 파악했다. 다음으로 기만 전술을 펼쳤다. 유엔군은 북한군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군산, 영덕, 삼척, 남포 인근에서 군사 행동을 전개했다. 폭격을 통해 군산의 도로와 교량 등을 파괴, 북한군으로 하여금 조만간 이쪽으로 상륙 작전이 전개될 것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미국과 영국의 특공대가 군산에 기습 상륙을 단행한 뒤 철수했으며, 미군 항공기가 출현해 '민간인들은 속히 대피하라'는 내용이 담긴 전단지를 살포하기도 했다. 영덕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나타났다. 삼척에서는 미군 전함이 함포 사격을 실시했다. 아울러 워커는 한 기자회견에서 의도적으로 '10월 상륙설'을 흘렸다. 김일성 등은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였고, 9월 낙동강 전선에 더욱 사활을 걸었다.
유엔군의 사전 포격이 인천에만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상륙 작전이 임박한 9월 13일, 유엔군은 인천에 있는 철도, 도로, 터널 등을 겨냥해 대대적인 포격을 실시했다. 화들짝 놀란 북한군은 즉시 지휘부에 인천으로의 상륙 가능성을 보고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유엔군은 조만간 인천상륙작전을 전개할 참이었다. 미 육군 제7사단이 요코하마에서, 미 해병 제1사단이 고베에서, 미 해병 제5연대 및 한국군 해병 제1연대가 부산에서 각각 출격했다. 상륙군이 탑승한 수송선단은 261척에 달했다. 이들은 14일 서해의 덕적도에 집결한 뒤 인천으로 향했다. 운명의 15일 새벽 2시, 드디어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됐다. 상륙 명령이 하달되자, 우선 미군과 한국군의 연합 특공대가 팔미도 등대를 재빠르게 점령했다. 뒤이어 미군 항공모함에서 날아오른 함재기와 전함들이 인천 해안가에 무차별 포격을 퍼부었다. 이 직후, 미 해병대와 전차가 탑승한 여러 척의 상륙정들이 월미도 북단의 그린비치로 돌진했다. 북한군의 저항은 미미했다. 해안포는 미군의 포격으로 무력화됐고, 당황한 나머지 전선을 이탈하는 북한군 병사들이 속출했다. 1차 상륙은 순조롭게 이뤄졌고 후속 상륙도 속속 전개됐다. 미 해병대는 월미도를 신속히 장악해 나갔다. 참호 속에서 저항하는 북한군을 전차포로 가볍게 제압했으며 잔적들을 모조리 소탕했다. 오전 8시, 미 해병대는 월미도를 점령했다. 이후 미군은 전투기와 박격포 등으로 소월미도에 있는 북한군까지 공격했다. 여기서도 북한군은 가볍게 제압됐다. 1단계 작전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썰물이 되면서 미군 함정들은 잠시 뒤로 물러났고, 상륙군은 월미도에 고립됐다. 이때 미군 항공기들이 대거 출격, 북한 증원군이 진입해 상륙군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엄호했다. 오후에 만조가 되면서 인천항(적색해안)을 겨냥한 2차 상륙 작전이 전개됐다. 미 해병 제5연대 등이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인천항 도크를 손쉽게 확보한 뒤 감제고지를 탈환했다. 그런 다음 곧바로 인천 시가지로 진격해 북한군 소탕 작전을 펼쳤다. 상술했듯 북한군 병력은 많지 않았고, 이미 상륙작전의 여파로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소탕은 수월하게 이뤄질 수 있었다. 인천항과 더불어 인천 남동부(청색해안)에도 미군이 상륙했다. 한국군 제17연대도 뒤를 따랐다. 이들도 머지않아 목표인 해두보를 확보했다. 9월 16일 아침, 인천은 미군과 한국군에 의해 완전히 수복됐다. 당초 우려했던 바와 달리, 인천상륙작전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돼 전사자도 적게 발생했다. 맥아더가 고집스럽게 밀어붙인 '세기의 도박'은 의외로 쉽게 전과를 올리며 전황을 급변하게 만들었다.
이후 유엔군과 한국군은 파죽지세로 북진해 나갔다. 허를 찔린 북한군은 속절없이 밀렸다.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뻔했던 한국이, 인천상륙작전 한방으로 극적으로 기사회생한 뒤 한반도 통일까지 목전에 뒀다. 비록 예상치 못한 중공군의 개입으로 통일 과업을 달성하진 못했지만, 우리나라는 한반도의 절반만이라도 보존하며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 본인은 맥아더의 활약상도 높이 평가하지만, 그 당시 상륙작전에 참가한 장병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낯선 국가에서,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 자유와 정의를 수호하려 했다. 대한민국은 이들의 노고가 헛되지 않게 했다. 눈부신 번영을 거듭해 선진 강국으로 도약했다. 아서 맥아더 4세의 말처럼, 이는 인천상륙작전의 위대한 결실이었다. 하늘에 계신 장병들이 뿌듯하게 바라볼 것 같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 오랜만에 송도에 있는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에 가봐야겠다. 그곳에서 경의를 담아 호국 영령들을 추모해야겠다. 한국전쟁과 인천상륙작전의 전개 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본인의 저서 <전쟁의 역사>도 헌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