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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간의 골육상쟁이 깃들다

[역사 탐방기] 살곶이에서 만난 이성계와 이방원

by 최경식
살곶이 다리. 왕의 행차가 자주 행해지는 지역에 돌다리를 건설했다.

본인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역사적으로 특별한 유적지가 있다. 서울 성동구 한양대학교 뒤쪽의 중랑천을 가로지르는 '살곶이' 다리가 그것이다. 이 다리는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석교로써 매우 가치 있는 유형문화재다. 세종 2년인 1420년에 다리를 짓기 시작해 성종 14년인 1483년에 완공했다. 당시에는 이 다리가 반석처럼 튼튼하다 해서 '제반교'로 명명했다고 한다.


왜 다리 이름이 살곶이일까? 워낙 특이한 이름이라 자연스레 궁금해졌다. 우선 살곶이는 '화살이 꽂힌'이라는 뜻을 갖고 있었다. 그 유래와 관련해 다양한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특히 본인의 관심을 끈 이야기는 이성계와 이방원과 관련된 것이었다. 조선의 창업자인 이성계와 그 아들이자 조선의 제3대 군왕인 이방원의 관계는 매우 좋지 않았다. 이유는 후계 문제 때문이었다. 이성계는 자신의 뒤를 이을 왕으로 여덟 번째 아들인 이방석을 선택했다. 본래 왕조 국가에서는 가장 큰 아들 혹은 공이 많은 아들이 후계자가 되는 게 상식이었다. 이에 따라 이방과나 이방원이 후계자가 돼야만 했다. 하지만 이성계는 모두의 예상을 깬 선택을 했다. 아마도 이방석을 낳은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 씨를 총애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불합리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방원은 결국 '제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을 일으켰다. 이를 통해 세자인 이방석과 그를 비호하는 정도전 등을 척살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이성계는 "하늘이 두렵지 않으냐"라며 절규했지만, 이방원의 기습적인 쿠데타를 당해낼 수 없었다. 이후 이성계는 왕위를 내려놓고 함경도로 떠나버렸다. 이방원은 끊임없이 아버지를 돌아오게 하려 했지만, 이성계는 좀처럼 환궁하지 않았다. 아들에 대한 노여움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컸기 때문이다. 급기야 이성계는 함경도에서 세력을 규합해 이방원에게 군사적으로 맞서기까지 했다. 이른바 '조사의의 난'이었다.


이성계는 조사의와 그의 병력을 배후에서 지휘하며 초반에 잠시나마 우세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아 이방원이 이끄는 관군에게 패배했다. 이성계는 반란군의 수괴였지만, 이방원은 조사의와측근들만을 처형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했다. 야사에 따르면, 이방원은 이성계를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북쪽 지역에 내버려 뒀다고 한다. 이전처럼 끊임없이 사람을 보내 궁궐로 돌아오라고 종용만 했다. 몇 번이나 거절하던 이성계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정신적 스승이었던 무학대사의 설득이었다.


살곶이 다리와 살곶이 지명의 유래를 알려주는 표지판.

이방원은 이성계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현재의 살곶이 다리 부근으로 마중 나갔다. 꿈에도 그리던 아버지를 만난다는 생각에 이방원은 매우 들떠 있었다. 이성계가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기실 이성계는 이방원을 직접 만나 죽이려고 했다. 마침내 두 부자가 살곶이에서 마주했을 때, 불행한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이성계는 갑자기 이방원을 향해 화살을 쐈다. 과거 여진족과 왜구들을 상대하며 신기에 가까운 활 솜씨를 선보였던 그 이성계의 화살이 이방원에게 날아갔다. 가까스로 이방원에게 천운이 따라줬다. 그는 급히 몸을 피했으며, 화살은 한 정자의 나무기둥에 꽂혔다. 이성계는 아쉽다는 듯 활을 바닥에 내동댕이쳤고, 이방원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바로 여기서 '살곶이'라는 지명이 유래했던 것이다. 살곶이 다리 주변에 있는 표지판은 해당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증언해주고 있다.


여담으로 이방원의 목숨을 거두려는 이성계의 참담한 노력은 계속됐다. 그는 환궁 잔치가 열린 자리에서 소매 안에 철퇴를 감추고 이방원을 노렸다. 이방원이 자신에게 직접 술을 따를 때 철퇴로 내리치려고 했다. 하지만 이방원의 최측근이었던 하륜의 기지로 이것이 무위에 그쳤다. 이성계의 의도를 눈치챈 하륜이 예법을 거론하며 환관으로 하여금 대신 술을 따르게 했던 것이다. 이방원 제거 계획이 연이어 실패하자, 이성계는 마침내 단념했다. 모든 것을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였고, 비로소 이방원에게 옥새를 건네며 왕으로 인정했다고 한다. (무인정사와 조사의의 난, 부자간의 갈등과 관련한 내용들은 <정변의 역사-확장판>에 자세히 담겨있다.)


살곶이 다리에서 바라본 중랑천의 풍경.

본인은 역사 탐방이 꼭 거창한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체계적인 계획 하에, 적잖은 품을 들여 특정 장소로 가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와 매우 가까이 있는 곳,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곳에서도 얼마든지 역사 탐방을 할 수 있다. 살곶이가 바로 그러한 사례이며, 이밖에도 다양한 사례들이 존재할 것이다. 결국 역사에 대한 애정과 의지만 있다면, 언제든 역사 탐방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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