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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총통

[역사 탐방기] 대만 중정 기념당

by 최경식

중국 역사를 돌이켜보면 수많은 인물들이 명멸해 갔다. 이 가운데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이 가는 인물이 바로 '장제스'다. 장제스는 중국 국민당 총재와 중화민국 총통을 역임한 인물이다.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성장한 그가 군인의 길을 걷고, 신해혁명 등을 통해 쑨원의 후계자로 거듭난 뒤 중국 대륙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과정은 상당히 드라마틱하다. 이후에 벌어진 '중일 전쟁'에서 장제스는 중국 전체의 지도자로서 무자비한 일본 제국주의에 분연히 맞서 싸웠다. 중국군의 사기를 증진시키고 중국인들의 항전 의지를 끌어올려 전황을 개선시켜 나갔다. 비록 서방 연합군의 외력에 힘입어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장제스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헌신적인 노력이 승전에 큰 역할을 한 것을 결코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전후에 발발한 '국공 내전'에서 장제스의 불행이 시작됐다. 국공 내전 직전까지만 해도 장제스와 국민당은 명실상부 중국의 주류 세력이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장제스 국민당의 중국 대륙 통치를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오쩌둥과 공산당이라는 덫에 걸려들었다. 이들은 당초 소수 세력에 불과했지만, 중일 전쟁을 틈타 세력을 급속도로 확장했고 국민당에 군사적으로 대적하기에 이르렀다. 급기야 기가 막힌 전략 전술을 구사하며 우둔한 국민당에 최종 승리를 거뒀다. 한때 대륙을 호령했던 장제스와 국민당은 대만으로 쫓겨났고(국부천대 國府遷臺), 마오쩌둥과 공산당이 대륙 전체를 장악했다. (최근 출간한 <전쟁의 역사> '중일 전쟁', '국공 내전' 편에서 해당 사실들을 자세히 다뤘다.)


장제스는 '비운의 총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온갖 고생을 하며 국가적 위기 상황을 극복해 냈지만, 전후에 돌아온 것은 비참한 폐주의 모습이었다. 그는 대만에 있는 동안, 반드시 대륙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75년 세상을 떠났다. 이 같은 격동의 인생사는 본인으로 하여금 장제스라는 인물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언젠가 장제스의 흔적이 남아있는 역사적 장소에 가보고 싶다는 소망도 갖게 했다. 이는 2019년 12월 대만 여행을 가면서 현실화될 수 있었다.


수도인 타이베이에 '중정 기념당'이 있었다. 중정은 장제스의 본명이다. 대만의 경제 발전을 이룩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 이 건물은 흰색 대리석으로 된 본체와 파란색 지붕으로 구성돼 있다. 파란색 지붕은 중화민국 국기색을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기념관에 가기 전, 탁 트인 자유광장을 먼저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서 각종 시위, 집회, 문화 행사가 열린다. 독재자인 장제스의 기념관 앞에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장소가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중정 기념당 내부로 들어가려면, 89개로 이뤄진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여기에도 숨겨진 의미가 있다. 장제스의 사망 나이가 89세였던 것을 상징하는 계단이다.


우선 장제스의 각종 활동상들이 담겨있는 지하 전시실로 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쑨원과 함께 있는 그림 및 사진이었다. 장제스는 중국과 대만에서 국부로 삼는 쑨원을 매우 존경했다. 그의 후계자를 자처하고 나라 곳곳에 쑨원 관련 기념물들을 설치한 것은 존경심의 발로였다. 물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한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장제스를 강인한 군인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군복을 입은 장제스의 모습을 많이들 연상한다. 그러나 장제스는 군인인 동시에 '문인'으로서의 면모도 상당하다. 본인이 그런 이미지로 비치길 원했다. 그래서 옷도 수수하게 차려입곤 했다. 전시돼 있는 옷들은 장제스가 평소에 즐겨 입었던 것이다. 장제스의 옷 옆에는 그가 군복에 달고 다녔던 훈장들이 있다. 한마디로 최고 권력자임을 상징하는 훈장이다.


장제스는 애처가였다고 한다. 부인인 쑹메이링 여사를 지극히 사랑했다. 장제스가 구애할 때, 신중한 쑹메이링이 제시한 요구 조건이 유명하다. 첫째, 기독교로 개종할 것. 둘째, 첫 번째 부인과의 관계를 정리할 것. 장제스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고, 1927년 두 사람은 결혼했다. 쑹메이링은 내조만 한 게 아니다. 정치, 군사, 외교 등 다방면에 관여했으며, 국제정치 무대에 자신을 각인시키기도 했다.


장제스는 미국과의 관계를 굉장히 중시했다. 미국의 지원 없이는 숙원인 본토 수복은 물론 대만 방어도 힘들다고 확신했다. 이에 장제스는 영향력 있는 미국 지도자들(위 맥아더 장군, 아래 존슨 대통령)을 적극적으로 만나는 외교적 노력을 지속했다. 그 결과 본토 수복은 이루지 못했지만, 대만 방어에는 성공했다. 기실 미국에 있어 장제스는 애증의 대상이었다. 한편으론 본토를 빼앗긴 무능한 지도자라고 비난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자유 중국'의 지도자로서 반드시 수호해야 할 인물로 여겼다.


장제스 관련 사진들 중에서 우리나라에 가장 많이 알려진 사진이 바로 이것이다. 1943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과 만난 사진이다. '카이로 회담'은 우리나라에 커다란 의미가 있다. 여기서 한국의 독립이 최초로 보장됐다. 장제스는 종전 즉시 한국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에게 있어 장제스는 '은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장제스가 이 같은 행동을 하기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투사들의 숭고한 노력이 있었다. 특히 장제스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큰 감명을 받아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중국의 100만 대군이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젊은 청년이 해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앞서 문인으로써의 장제스를 언급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역시 군인의 모습이 더 어울리는 듯하다. 비교적 왜소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군부를 휘어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리더십 때문이다. 그는 진두지휘하는 것을 좋아했고, 목표를 정하면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갔다. 이러한 장점 덕분에 몇 번이나 하야 위기가 있었지만, 마땅한 대체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시 전면에 등장하곤 했다. 다만 자신감이 자만으로 빠지는 경우가 많았고, 자기 확신과 고집이 지나쳐 대업을 그르치는 일이 허다했다. 결국 마오쩌둥에게 중국 대륙을 내주는 비참한 결과로 이어졌다.


장제스의 집무실과 일하는 모습을 재현한 공간도 있었다. 최대한 그 당시 그대로의 모습으로 재현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마치 장제스가 살아있는 듯한 느낌도 받았다. 실제로 장제스는 집무실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오랜 시간 일하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부하들은 꽤나 피곤했을 것 같다.


탐방의 하이라이트는 장제스의 거대한 동상과 근위병 교대식이다. 지금은 근위병 교대식이 중정 기념당 앞 민주 대로에서 진행되지만, 이때는 장제스 동상 앞에서 진행됐다. 정해진 시간이 됐을 때, 근위병들이 앞으로 나와 엄숙하게 제식 동작을 전개했다. 이들의 동작은 그야말로 '칼각'이었다. 약 10분 간 교대식을 진행하는 동안,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정확하게 제식 동작을 완료했다. 이를 지켜보던 관람객들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교대식이 끝나면 관람객들이 장제스 동상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저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장제스를 만났다. 인상 깊었던 장면은, 한 관람객이 멋들어진 자세로 장제스 동상에게 거수경례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장제스를 존경하는 마음을 군인적인 자세로 표현한 것 같다.


사실 장제스란 인물은 대만 내에서 논쟁의 중심에 있다. 한편에선 반대파를 탄압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독재자라고 혹평한다. 다른 한편에선 중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대만의 성장을 견인한 훌륭한 지도자라고 호평한다. 두 정당인 민진당과 국민당이 번갈아 가면서 집권할 때마다 장제스의 위상도 달라졌다. 민진당은 장제스를 독재자로 규정하며 전국에 있는 장제스 동상 철거 등 격하 운동을 벌여나갔다. 이의 여파로 중정 기념당도 한때 지하 전시실이 폐쇄됐었고, 근위병 교대식도 바깥에서 열리게 됐다. 반면 국민당이 집권했을 때에는 장제스를 다시 복권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본인도 장제스는 공과가 뚜렷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박정희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역사 인물을 살펴볼 때에는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봐야 한다. 이것들을 종합해 나름의 평가를 도출하면 될 일이다. 분명한 것은, 장제스라는 인물이 대만은 물론 중국 역사에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거대한 족적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이에 따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장제스는 두고두고 회자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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