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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참혹함

[이야기] 인간성 말살과 트라우마

by 최경식

요즘처럼 전 세계적으로 '전쟁' 관련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경우도 드물었던 것 같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계속되고 있고, 러시아와 서방 간의 군사적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중동 및 양안(중국-대만) 정세도 심상치 않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격언에 기초한다면, 전쟁은 인간 역사에서 끊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비교적 작은 전쟁이 큰 전쟁으로 확대될 가능성이다. 과거에 있었던 큰 전쟁들도 작은 충돌에서부터 비롯됐다. 전 세계 지도자들이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는다면, 자칫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 전쟁에 대해 너무도 쉽게 말하는 이들이 자주 보인다.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면, 전쟁을 하나의 게임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그 속에서 화자는 용감하게 전쟁터로 나가 공훈을 쌓는 영웅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실제로 전쟁이 이렇게 낭만적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전쟁은 참혹함 그 자체다. 대규모 파괴가 동반되고, 수많은 인명이 살상된다. 무엇보다 심각한 점은 '인간성 말살'이다. 전쟁은 필연적으로 군대라는 집단이 동원된다. 그 군대는 철저히 상명하복으로 이뤄진다. 개인은 완전히 배제되며, 오로지 전체주의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어느덧 개인의 인간적 감정은 사라지고, 군대라는 무정한 집단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기계적 개체만이 남는다. 설상가상으로 전장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상황들은 해당 개체의 인간성 말살을 촉진시킨다. 이에 따라 무자비한 살육이 아무렇지 않게 발생하게 된다. 결국 전쟁은 물리적 재난 못지않게 정신적 재난을 초래하는 것이다.


수많은 역사적 사례들이 이를 실증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 미군 병사는 "전쟁 과정에서 동물처럼 변해 갔다.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이 무딜 대로 무뎌졌고, 내 주위를 둘러싼 고통과 시련에 대해 무감각해졌다"라고 말했다. 이의 여파로 천인공노할 '미라이 학살' 사건이 유발됐다. 가장 적나라한 사례를 꼽으라면, 1937년 중국에서 발생한 '난징 대학살'을 거론할 수 있다. 이 사건은 전쟁에서 인간성이 얼마나 망가질 수 있는지, 그 결과 어떠한 참변이 초래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 장면들.

난징 대학살

'중일 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은, 상하이 전투에서 중국군을 손쉽게 격파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자신들의 전력을 과신한 반면 중국군의 전력은 얕잡아 봤다. 그런데 승리를 하긴 했지만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상하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4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 일본군은 중국군의 저항 능력에 놀라면서도 독기를 품었다. 열등한 것들이 감히 천황의 군대에 생채기를 낸 데 대한 복수를 하기로 다짐했다. 그 처참한 현장이 될 곳이 바로 난징이었다. 국민당 정부와 중국군이 난징을 포기했을 때, 이곳에선 대규모 혼란이 발생했다. 일부 중국군 병사들이 건물에 불을 질렀고 상거래가 무너졌으며 주요 피신처로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몰려와 빽빽해졌다. 무엇보다 위생 시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난징 곳곳에 온갖 배설물들이 가득했다.


12월 13일, 마침내 일본군이 난징에 입성했다. 중국인들은 그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신경을 곤두세웠다. 상술했듯 일본군은 이미 이성을 상실한 상태였다. 거리에 있는 무고한 중국인들에게 다가가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고 총검을 휘둘렀다. 총탄은 수많은 중국인들의 머리와 몸을 박살 냈고, 날카로운 칼은 그들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었다. 일부 중국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지만, 이내 붙잡혀서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다. 눈과 귀가 사라지고 코는 일부만 남았다. 참수를 당해 떨어진 머리가 도처에 나뒹굴기도 했다. 난징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현장이 됐다. 일본군의 학살 방식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병사들이 총보다 칼로 사람을 죽이는 데 능숙했다는 것이다. 자신들을 봉건 시대의 무사인 '사무라이'라고 생각하며 시도 때도 없이 난도질을 했다. 심지어 일부 병사들은 '목베기 대회'를 하기도 했다. 누가 먼저 중국인 100명의 목을 베는지를 두고 경쟁했다. 여기서 우승한 병사는 중국인들의 잘린 머리통을 들고 환하게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중국인들은 일본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뒤 아무 곳에나 암매장됐다. 그런데 산 채로 '생매장'을 당하기도 했다. 일본군은 넓은 구덩이를 판 후에 손이 뒤로 묶인 중국인들을 대거 밀어 넣었다. 중국인들은 저마다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구덩이가 중국인들로 빼곡해지자 일본군은 그 위를 흙으로 덮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결코 빠져나올 수 없도록 매우 단단하게 무덤을 만들었다. 생매장된 곳에서 중국인들의 끔찍한 비명소리가 한동안 이어지다가 잠잠해졌다. 당시 난징에서 학살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은 "시체들을 밟지 않고는 좀처럼 거리를 걸을 수 없을 정도였다"라고 말했다. 이때 소멸된 중국인들은 약 3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군은 자신들이 그저 패잔병들을 소탕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학살을 정당화했다.


학살에 더해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강간'도 무차별적으로 자행됐다. 매일, 매시간마다 중국 여성들이 일본군에게 강간을 당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하루에만 1000여 명의 여성들이 강간을 당했다는 기록도 있다. 12세 소녀에서부터 60세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강간은 전방위로 이뤄졌다. 수많은 여성들이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을 해야 했다. 가끔씩 처절한 저항도 있었다. 일부 여성들은 순결을 지키기 위해 맨몸으로 맞서 싸웠다. 더러운 배설물을 자신의 온몸에 발라 접근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했다. 맞서 싸운 여성들은 결말이 좋지 못했다. 일본군은 그 자리에서 칼을 뽑아 해당 여성들의 목을 내리쳤다. 1938년 1월 중순이 될 때까지, 약 6주 동안 일본군은 난징을 비롯한 중국 중부 지역에서 학살과 강간, 약탈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국제 사회가 이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도록 보안에 각별히 신경 쓰기도 했다. 하지만 국제안전위원회 등의 노력으로 일본군의 만행은 서서히 알려졌다. 2월 중순에 접어들어서야 일본군의 광기는 사그라졌다. 이제는 공포 유발보단 주민들의 협력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전환했다. 중국군과의 또 다른 대규모 전투를 대비한 포석이었다.


■트라우마

'전쟁 문학의 거장'인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는 대표작인 <개선문>에서 전쟁의 참상과 전후 인간회복 과정의 어려움을 적절히 묘사했다. 주인공인 라비크는 조안을 사랑함으로써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려 했지만, 그러한 목적을 좀처럼 달성할 수 없었다. 그만큼 전쟁의 상처가 깊게 각인됐기 때문이다. 전쟁은 벌어지는 당시에는 물론 그것이 종결된 후에도, 참전한 군인들과 민간인들에게 평생 잊히지 않는 트라우마를 선사한다. 과거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겪었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금껏 고통을 호소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전쟁이라는 괴물, 이것은 지속적으로 진화해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쟁 이론인 '상호 확실한 파괴'에 따르면, 이제 전쟁은 그 누구의 생존도 담보할 수 없으며 인류 문명의 완전한 절멸을 가능케 할 수 있다. 전쟁을 사전에 예방하고 억제하는 것만이 인류의 항구적인 평화와 번영을 보장하는 길이다. 미국의 제34대 대통령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했던 명언, "제3차 세계대전에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전쟁을 막는 것뿐"이라는 말을 항상 되새길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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