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탐방기] 김영삼 도서관과 거제 생가
본인의 인생에서 실제적으로 처음 접한 대통령은 '김영삼'이다. 그 어릴 적에도 이 사람은 뇌리에 강렬하게 각인됐다. 그만큼 인상 깊은 무언가를 많이 했기 때문이다. 민주화 운동, 하나회 대숙청, 금융실명제, 조선총독부 폭파, 역사 바로 세우기, 전두환 노태우 구속 등. 하나하나 굵직한 사건들이었다. 다만 임기 말에 'IMF'라는 거대한 환란으로 인해 안 좋게 퇴장한 것도 각인됐다.
나이가 들어서도 김영삼이라는 인물에 관심을 가졌다. 역사적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렸지만, 본인에게는 좋은 평가가 더 많은 자리를 차지했다. 이유는 김영삼 대통령에 대해 인간적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핵심은 '용기'였다. 그가 살아온 길을 살펴보면, 용기라는 가치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엄혹한 군사정권 시절에 행했던 민주화 운동은 물론 하나회 대숙청, 금융실명제, 총독부 폭파 등 거의 모든 일들이 강력한 용기 없이는 불가능했다. 특히 군부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던 하나회 군인들을 일거에 척결한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본인은 김영삼 대통령의 근거지였던 상도동에 오래 살았기에 더욱 그를 가까이할 수 있었다. 개관한 지 얼마 안 된 '김영삼 도서관'은 매우 친숙한 장소였다. 생각보다 시설이 좋았기 때문에 여러 번 방문해서 책을 읽곤 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적 활동들을 다방면으로 살펴볼 수도 있었다.
총 9층 높이의 도서관에 처음 들어서면 굉장히 높은 책장을 볼 수 있다.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책들이 비치돼 있었다.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첫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방문자들은 '사색의 숲', '일상의 발견', '디지털 미디어 라운지' 등에서 독서하거나 공부할 수 있다. 공간이 비교적 넓고 조용해서 사용하기에 좋다.
영상실에 들어가면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적 활동들을 생생히 볼 수 있다. 본인이 인상 깊게 봤던 장면들이 몇 가지 있다. 우선 전두환 정권 하에서 가택연금을 당했을 때, 경찰들에게 호통치는 장면이다. 험악하게 생긴 경찰들 앞에서 김영삼은 "(아무리 탄압을 해도) 내 양심을, 마음을 전두환이 뺏지는 못해!"라고 소리쳤다. 이러한 모습과 목숨을 건 단식 투쟁은, 그 당시 독재에 신음하던 수많은 민중들과 운동가들에게 한줄기 빛과 용기로 다가왔다.
개인적으로 김영삼 대통령이 가장 빛났던 장면은 박정희 정권 시절에 있었던 'YH 무역 사건'이다. 가발 수출회사인 YH무역에서 근로조건 및 처우 개선 등을 요구하던 여성 노동자 187명이 신민당 당사로 모여들었다. 한없이 약자였던 여성 노동자들은 야당의 정치적 도움 및 여론의 도움을 얻으려 했다. 자칫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야권 지도자였던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이들과 면담을 가진 뒤 신민당 당사 안에서 함께 투쟁할 것을 약속했다. 이때 김영삼이 여성 노동자들에게 한 말이 유명하다. "성경에 나옵니다. '너희는 결코 두려워 말라.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희를 붙들리라.' 걱정 마세요. 대한민국 역사에서 공권력이 야당 당사를 습격한 적이 없습니다. 나도 있고 국회의원 30명이 여기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대규모 경찰 병력을 투입해 여성 노동자들의 신민당 농성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다. 김영삼과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 및 당직자들은 스크럼을 짜서 경찰의 당사 진입을 기필코 막아내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내비쳤다. 더욱이 김영삼은 신민당 당사 주변에서 경찰청 정보과, 보안과 형사들을 발견하면 멱살을 잡고 뺨을 후려쳤다. 심지어 진압 작전을 지휘하는 마포경찰서장을 만났을 때에도 "너희들이 저 여공들을 다 죽일 셈이냐"라고 외치며 뺨을 후려쳤다. 가히 '김영삼다운' 행동이었다. 하지만 농성 3일째 새벽에 2000여 명에 달하는 경찰 병력이 진압 작전을 개시, 신민당 당사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이들은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며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연행했다. 김영삼 역시 결연히 맞서 싸우다가 경찰들에게 끌려갔다. 이 와중에 여성 노동자 김경숙이 건물 옥상에서 추락해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경찰은 김경숙이 투신 자살했다는 거짓 발표를 했다. 뒤늦게 김경숙 사망 소식을 접한 김영삼은 "이 암흑적인 정치, 살인정치를 감행한 이 정권은 필연코 머지않아서 반드시 쓰러질 것이다. 쓰러지는 방법도 비참하게 쓰러질 것이라고 내 예언해 두는 바이다"라고 포효했다. 공교롭게도 이 사건이 있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박정희 정권은 몰락했다.
대통령 김영삼의 활동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상술했던 '하나회 숙청'과 '역사 바로 세우기'다. 영화 <서울의 봄>을 보면 알 수 있듯, 하나회는 12.12 쿠데타 이후 대한민국 군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아무리 대통령이라 해도 이들을 숙청한다는 것은 사실상 '목숨을 내놓고'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김영삼 대통령은 "군의 진정한 명예와 국민적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 하나회 숙청을 단행했다. 숙청은 매우 과감하고 신속하게 이뤄졌다. 반격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하나회의 머리들을 단칼에 잘라버렸다. 쿠데타 가능성을 감안해 밤샘 근무를 하며 군부대의 동향을 꼼꼼히 살폈다. 일부 하나회 소속 군인들이 "고려 시대 무신정변이 왜 일어난 지 아느냐"라며 겁박할 때, 그는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라고 외치면서 집요하게 숙청을 이어갔다. 숙청 개시 두 달 반만에 떨어진 별이 40개가 넘었다. 지극히 '김영삼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단번에 역사적 과업을 완수했다.
역사에 가정이란 있을 수 없지만, 만약 김영삼 대통령이 하나회로 대변되는 강력한 군부와 타협해 '어색한 동거'를 했다면 어땠을까. 군부의 막강한 권세는 지속됐을 것이고, 미얀마 사태와 같은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을 가능성을 결코 배제할 수 없다. 즉 타협과 동거는 현실의 안온함을 위해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올바른 미래를 위한 김영삼 대통령의 용기 있는 행동은, 비로소 우리나라를 정치군인들의 쿠데타 위협에서 해방시켰다. 이후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행해진 전두환 노태우 구속과 조선총독부 폭파, 그리고 금융실명제도 대단한 업적이었다. 이를 행하는 데 따르는 엄청난 저항들을 물리치고 기어이 역사적 과업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김영삼 대통령의 의지와 용기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상실을 지나가면 김영삼 대통령의 다양한 사진들과 명언들을 만나볼 수 있다. 김영삼 대통령은 생전에 여러 명언들을 남겼다. 이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말은 "아무리 닭의 목을 비틀지라도 새벽이 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이다. 독재 정권이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이들을 모질게 탄압한다 해도, 민주주의의 새벽은 반드시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명언은 그 당시 수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힘이 됐다.
김영삼 정부 5년 간 있었던 외교 정책들이 연도별로 정리돼 있기도 했다. 평화통일 외교, 세일즈 정상 외교, 세계로 나아간 신외교 등이 소개됐다. 당시에 미국 클린턴 대통령 및 중국 장쩌민 주석과 활발하게 접촉했던 김영삼 대통령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로 인해 미국, 중국과의 관계는 비교적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대일 외교에서는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선명한 목소리를 내며 강경 기조를 내세웠던 게 생각났다. 대북 외교는 시종일관 대북 강경책으로 인해 성과를 전혀 거두지 못한 게 아쉬웠다.
김영삼 도서관뿐만 아니라 거제에 있는 생가도 지난여름에 방문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이곳에서 13세까지 지냈다고 한다. 생가는 전형적인 기와집 형태이고 본채, 사랑채, 안채 등으로 구성돼 있다. 생가 내부에는 김영삼 대통령의 부모님 사진과 생전에 썼던 친필 휘호 등이 전시돼 있다.
생가에서 눈길이 많이 갔던 것은 김영삼 대통령과 영부인 손명순 여사가 함께 찍은 대형 사진이었다. 두 사람은 65년 간 고락을 함께 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험난했던 정치 여정 속에서도 손명순 여사는 언제나 '조용한 내조'를 이어갔다. 김영삼 대통령은 아내 사랑이 남달랐다고 한다. 젊은 시절은 물론 말년에 이르러서도 남들이 주목할 정도로 애정 표현에 적극적이었다. 이런 사람을 9년 먼저 떠나보낼 때, 손명순 여사는 무척 슬퍼했다고 한다.
사실 김영삼 대통령은 장점만큼이나 단점도 많은 사람이었다. 또한 과오도 많았다. 본인과 달리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본인도 김영삼 대통령의 부정적 측면들을 결코 간과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를 생각하는 이유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지도자 개인의 강력한 의지와 용기로 말미암아 한국 사회가 크게 변화된 '통쾌한 경험'에 대한 그리움 말이다. 이는 분명 현재와는 다른 모습이다. 지금은 지도자 개인의 의지나 용기만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지난한 절차와 소모적인 논쟁이 언제 어디서나 끼어드는 답답한 형국의 연속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가장 빛나던 시절을 돌아보며, 본인 내면에 응어리진 답답함을 풀어보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대도무문'(大道無門). '옳은 일을 함에 있어 거칠 것이 없다'는 김영삼 대통령의 좌우명이 새삼 마음에 울림을 주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