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과일에 빠진 엄마 덕분인지 콩알만 했던 알콩이는 막달에 예상보다 많이 컸다. 담당 선생님의 권유대로 예정일보다 조금 일찍 출산을 하기 위해 매일 걷고 요가를 했다.
엄마의 바람을 알았던 것일까? 알콩이는 예정일보다 2주 먼저 세상에 나오기 위한 신호를 보냈다. 병원에 전화하니 진통 간격이 5분 정도 될 때 내원하라고 했다. 통증에 둔감하고 고지식한 나는 진통 간격이 5분이 될 때까지 집에서 몇 시간을 끙끙댔다. 병원에 도착하니 자궁이 이미 80퍼센트 열려 있는 상태였다.
새벽 3시 38분, 침대에 누운 지 40분 만에 아기를 낳았다.
출산 전 알콩이가 태어나는 순간을 상상하며 감격스러워 여러 번 울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어안이 벙벙할 뿐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울긴 왜 울어?" 공감하지 않았던 남편이 "여보! 알콩이 나왔어!"라며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간호사와 남편이 갓 태어난 아기를 따뜻한 물에 잠시 담근 후 내 품에 안겨 주었다. 방금 전까지 나의 뱃속에 있었던 작은 생명이 한쪽 눈을 뜬 채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기하다! 진짜 신기해!' 그 순간만큼은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아기는 곧 신생아실로 옮겨졌고 남편과 2시간여의 회복 시간 동안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창 밖으로 동이 터오는 걸 보며 ‘내가 엄마가 되었구나. 내가 엄마가 되었구나.’ 여러 번 되뇌었다.
그날의 기억은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병원으로 가는 길, 급한 마음에 사이드 미러가 접힌 줄도 모르고 운전을 하던 남편의 뒷모습, 거울에 비친 파리했던 내 얼굴, 미역국을 한 술 뜨며 벌벌 떨렸던 내 손 그리고 생각보다 훨씬 야위고 작았던 나의 딸.
“알콩아, 엄마가 꼭 널 지켜 줄게."
처음 젖을 물리며 아기에게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그 후 시작된 육아는 상상 이상으로 힘들었다.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여러 번 바닥을 쳤고 우울증으로 상담도 받았다. 아이가 4살이 되어 통잠을 자기 시작하면서 나도 조금씩 몸을 회복할 수 있었다. 흙탕물처럼 탁했던 내 마음도 천천히 맑아지기 시작했다. 아이가 어렸을 적 사진을 가끔 들여다보면 울컥하다.
'이때 참 힘들었지. 그래도 더 많이 안아주고 엄마가 사랑한다고 더 자주 말해줄걸. 이렇게 바람처럼 시간이 지나갈 줄 알았더라면.'
우리 딸 신생아 시절
아이에게 처음 건넸던 말을 떠올려본다.
"엄마가 꼭 널 지켜 줄게."
엄마가 되었다는 설렘과 흥분은 무뎌지고 그저 일상에 치여 아이의 소중함을 모르고 지나가는 날이 얼마나 많았던가. 후회와 아쉬움이 가득한 내 마음을 [어떻게 말해줘야 할까] (오은영 지음)의 한 구절이 토닥토닥 어루만져 주었다.
쇠털같이 많은 날이 남아 있어요. 오늘은 그날 중 아이와 살아갈 날들의 첫날입니다. 아이를 처음 안았던 그날처럼 매일매일이 아이와 만나는 첫날입니다. 한마디 한마디가 아이에게 건네는 첫 말입니다.
맞다.
아직 많은 날이 남아 있다.
아이를 처음 안았던 그날의 마음을 자주 떠올릴 수 있다면, 그때 아이에게 처음으로 건넸던 말을 지금도 자주 해 줄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너무 비장해지지 않고 너무 욕심내지 않고 좀 더 행복하게 아이를 키울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