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살, 푸릇푸릇한 대학 신입생 시절 동아리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다. 졸업 후에도 드문드문 소식을 전하며 인연을 이어갔다. 그러다 29살 어느 날, 우린 연인이 되었고 2년 후 부부가 되었다.
콩깍지가 씌여 연애하는 동안에는 싸울 일이 없었다. 그러나 결혼 준비할 때부터 싸우기 시작했고 신혼 초에는 별별 사소한 일로 많이 다퉜다. 30대 후반에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된 이후 우리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내 그릇의 크기뿐만 아니라 배우자가 가진 그릇의 크기도 알게 되는 것이 바로 '육아'이다.
도토리 키 재기 마냥 똑같이 그릇이 작은 남편과 나는 몸과 마음이 고달플 때면 상대방의 마음을 품어주질 못한다. 그릇에 가득 찬 부정적인 감정을 ‘누가 더 힘드냐’라는 주제를 되풀이하며 쏟아낼 뿐이다.
남편과 다투며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양동이에 가득 찬 물을 쏟아붓듯 비난과 경멸의 말이 오가는 부부 싸움은 서로의 마음에 쉽사리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남긴다. 조금만 건드려도 다시 진물이 나는 그런 상처 말이다.
비혼 주의였던 내가 도대체 왜 결혼을 했을까? 딩크였던 내가 왜 아이를 낳았을까? 후회로 허우적대며 남편과의 헤어짐을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떠오르는 소소한 것들이 있다.
거실에 신문지를 펼쳐 놓고 함께 멸치를 다듬으며 느꼈던 따뜻한 햇살
산꼭대기에서 추위에 떨며 나눠 마셨던 복분자주의 달콤 씁쓸한 맛
대학로에서 길거리 와플을 먹다 사소한 걸로 한참을 웃었던 봄날의 꽃냄새
우리는 부부상담을 받기로 어렵사리 합의를 했다. 상담받는 동안 남편도 나도 많이 울었다. 서로를 선물 같은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되었을까? 마음 아파하면서...
게리 채프먼의 [5가지 사랑의 언어]라는 책에는 '인정하는 말, 함께 하는 시간, 선물, 봉사, 스킨십'이라는 5가지 사랑의 언어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제1의 사랑의 언어가 다르고 남편과 아내가 같은 사랑의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배우자의 사랑의 언어를 알아야 사랑을 전달할 수 있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상담을 통해 알게 된 나의 사랑의 언어는 '인정하는 말'이었고 남편의 사랑의 언어는 '봉사'였다.
맞다. 내가 남편에게 바라는 것은 '여보, 많이 힘들지? 충분히 잘하고 있어!'와 같은 따뜻한 응원이었다. 그리고 남편은 소박하지만 따뜻한 저녁 밥상에서 사랑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10년 넘게 부부로 살면서 서로의 사랑의 언어를 알지 못했었다. 그래서 정말 필요한 순간에 서로에게 위로가 되지 못했고 사랑을 전하지 못했다.
부부 상담 후에도, 서로의 사랑의 언어가 무엇인지 알고 난 후에도 우리 부부는 여전히 사소한 걸로 끊임없이 투닥거린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요즘은 흰머리 희끗희끗한 남편 얼굴 위로, 수줍던 20살 소년의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