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 처음 '사랑'이라는 말과 의미를 들었던 때는 초등학교 입학 전이었다.
아마 어머니였던 것 같다.
무엇이든 다 내주고픈 마음
엄마,아빠가 상윤이를 위하는 마음.
그게 사랑이라고 했다.
어머니,아버지가 알려주는 것들은 단박에 이해하는 편이었지만
왜인지 그 날, 그 사랑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유치원을 가서도 , 선생님에게 물어보아도
명확히 '알았다.'라는 느낌을 받은 기억이 없다.
이후에 그냥 그런 것인가 보다 하고
사랑을 방치해두었다.
25.10.23 16:25 이를 닦으면서 문득 사랑, 소유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고
하며 짱구를 굴렸다.
2년 전 나는 사랑을 한번 '정의'한 적 있다.
글을 썼다 지워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어딘가엔 기록 돼 있을지도)
'사랑'은 '지금'과 같은 것이다.
부족한 과거나 나아질 미래를 탓하거나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바라보고 그것에 행복할 줄 아는 것.
당시엔 건방지게도 그런 표현을 했다.
2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다만 오늘 들었던 생각은 따지고 보니
그 정의의 확장이지 않나.
현대인들은 많은 것들을 '소유'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다.
왜 그것을 갈망하는지 고심하기 보다
어떻게 하면 더 가질수 있을지 ,
어떻게 하면 가지지 못하여 덜 괴로울 수 있는지의 방법을 강구한다.
그건 현대인들의 잘못이 아니다.
다만 그 상태에서 '사랑'을 할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로 보인다.
자신의 시선과 눈 앞에 놓인 존재 그 자체를 긍정할 수 있는 시선.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 정의 하였지만
요즘 사람들의 관계에서는
사랑보다 우선되는 것이 바로
이해관계를 통한 수지타산이다.
내가 얼만큼 얻을 수 있느냐?
이것이 성립되지 않으면 관계가 진전되지 않는다.
만약 지금 내 앞에
" 저는 그런 사람도 아니고 당신이 말한 사랑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라고 단언하고 거짓이 아님을 증명한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몇 십억이라도 줄 수 있다.
왜냐면 그로인해 내가 얻을 것이 더 크기 때문에
난 종교가 없지만
하나님 혹은 예수님이라 불리는 작자들이 왜
"너와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이 너를 저주해도 사랑하라." 라는 표현을 사용했는지
이제서야 짐작이라도 해볼 뿐이다.
그것은 소시민들이 가질 수 있는 그릇이, 마음이 아니다.
즉, 불가능,불소유한 마음과 정서이다.
그러니 그런 정신으로 삶을 향유하라는 말이었을 테다.
소유의 저주속에서
눈앞에 놓인 존재 하나에게라도
하물며 그 존재가 자식임에도
그것이 나의 것이 아니고
나의 아랫사람이 아니고
언제든 내 곁을 떠나도 아쉬울 것 없고
몇년에 한번 보는 친우라 부를 수 있는 존재마냥
감정에 편향되지 말고
그저 우리 모두 스쳐가는 존재임을 인정하라는 뜻이다.
그게 어떻게 신이 아니라
철인이 아니라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는 일개시민이 가질 수 있는 마음이란 말인가?
나는 이제 사랑을 떠벌리는 모든 자들이 사기꾼이고
피해자인 것을 알았다.
사랑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에 초탈한 성인과 철인들과 같이,
한낱 흔들리고 마는 갈대들을 바라보는 것 같이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덧없이 정을 주지말고
오롯이 스스로가 자신답게 존재하라는
그것이 성립되어야 남의 실수도 가엽게 여기고 바라볼 수 있다는 말인 것을 알았다.
사랑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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