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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심삼녀_매일 사용하는 OO] 하루의 시작과 끝에,

하루의 끝에 콩을 불리고, 아침이면 두유를 만들며 하루를 여는 일

by 백수쟁이

매일 쓰는 물건이 생각보다 많다. 세면도구와 화장품, 차와 커피를 따르는 컵, 소박한 식사를 담아내는 그릇, 그리고 이 글을 쓰게 하는 아이패드까지. 의식하지 않지만 매일 쓰는 물건이 많다.


몇 달 전부터 한 가지가 더해졌다. 시어머니가 매일 쓰신다기에 나도 써보고 싶다고 했더니 선물해 주셨다. 전기 포트처럼 하얀색 기계. 심플한 디자인에 받침 없이 길쭉한 본체와 뚜껑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물건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밤부터 준비가 필요하다. 잠자리에 들기 전, 주방에 간다. 그릇에 콩을 한 스쿱 담아낸다. 검은콩도 좋고, 포만감이 드는 병아리 콩도 좋다. 그릇에 물을 담아내면 끝, 밤새 콩을 불린다. (덧붙이자면 콩을 불리지 않아도 된다. 나는 시어머니의 방법을 따라 했을 뿐이다.)


아침에 일어나 씻고, 밤새 부은 내 얼굴을 정돈한다. 그리고는 주방에 간다. 이곳에도 밤새 퉁퉁 불은 것이 있다. 어제 담아둔 콩이다. 콩을 이 물건에 쏟아내고 물을 채운다. 뚜껑을 닫고 버튼을 누르면 내 할 일은 끝났다. 이십 분 정도 요란한 소리가 난다. 물을 끓이고 콩을 갈아내는 소리다. 처음엔 이 소리에 남편이 깨지 않을까 조심스러웠지만, 지금까지 이 소리에 남편이 일어난 적은 없다.


만들어지는 동안 내 할 일을 한다. 스트레칭을 하거나 불렛 저널을 쓰면서. 시간이 금방 지나 완성되었다는 알림에 주방으로 간다. 뚜껑을 열면 기다렸다는 듯이 뜨거운 김과 고소한 내음이 확 밀려온다. 컵 두 개를 준비해 따라낸다. 남편과 한 잔씩 비워내기에 딱 좋은 양이다.


이 물건은 두유 메이커이다. 지금이야 퇴사를 해서 아침마다 식사를 챙기고 있지만, 회사를 다닐 때는 그러지 못했다. 출근 준비로 분주했고, 아침에는 왠지 모르게 예민해져 식욕이 없었다. 그런 우리에게 두유 메이커는 딱 알맞은 아침을 제공해 준다. 만드는 게 번잡스럽지도 않고, 간편하면서도 든든하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다. 예전엔 나 때문에 남편까지 아침을 못 먹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출근길에 종종 맥도날드에 들렀는데, 이제는 발길을 끊었다. 두유 덕분이다.


어젯밤에도 콩을 덜어내다 문득 생각했다. 이 모든 게 의식 같았다. 하루의 끝에 콩을 불리고, 다음 날 아침이면 두유를 만들며 하루를 여는 일. 매일 반복되는 일이지만 하루를 정돈하게 한다.


새로운 물건을 들일 땐 늘 걱정이 앞선다. 자리만 차지하다 결국 안 쓰게 될까봐. 이건 다르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고, 우리 가족 건강까지 챙기고 있으니까. 앞으로도 잘 사용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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