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만 있어도 충분한 일에 효용을 따지고 들었던 게 부끄러웠다.
퇴사 후 6월 한 달간 푹 쉬었다.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몇 가지 루틴을 얻었다. 모닝 페이지나 글쓰기, 아침 기도와 회사에 남편 데려다 주기 같은 것들. 이 일상이 자리 잡고 나니 새로운 것을 하고 싶어졌다. 무얼 할까. 막막함 속에 번뜩 문화회관 강좌가 떠올랐다.
문화회관은 회사 다닐 때도 이용한 적이 있다. 그때는 회사 일정에 맞추어 수강해야 했다. 평일 저녁이나 주말 강좌만 들을 수 있었는데 상황이 바뀌었다. 이제는 평일 저녁이나 주말을 피하게 되더라. 이왕이면 낮 시간에 수강하고, 저녁과 주말엔 개인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분기 별로 개강하기에 7월부터 시작하기 딱 좋았다. 홈페이지에서 강좌를 살펴봤다. 미용부터 어학, 운동, 악기, 주식까지 강좌가 다양했다. 재봉틀, 꽃꽂이, 가죽공예 수업이 눈에 들어왔다. 재봉틀은 예전부터 배우고 싶었고, 꽃꽂이는 남편이 예전부터 추천했어서, 가죽공예는 원데이 클래스로 재미있게 참여한 기억이 있어 관심이 갔다. 공공에서 운영하는 거라 수강료는 저렴했다. 주 1회 수업에 3개월 과정인데, 평균 10만 원 정도였다. 문제는 재료비. 맨 몸으로 하는 운동이나 교재비만 있으면 되는 다른 강좌와 달리, 내가 관심이 가는 것들은 매주 새로운 재료가 필요하고 재료비가 수강료보다 훨씬 비쌌다. 사설에서 배우는 것보다 훨씬 싸다는 걸 알면서도 백수인지라 머뭇하게 되더라.
비용 부담에 이어 이런 생각에 사로 잡혔다. 내 나이 마흔에 이런 걸 배워서 뭐 하나. 이런 걸 배우기엔 너무 늦은 거 아닌가. 창업을 하거나 공방을 열 것도 아닌데 말이다. 또, 여태 마케터로 일했는데 이것들이 내 커리어에 무슨 도움이 싶더라. 효용에 대한 고민도 더해졌다. 재봉틀을 배울 필요가 있나? 예쁜 건 이미 많고 사는 게 더 빠른데, 이 비효율을 왜 배운단 말인가. 꽃은 가만히 둬도 예쁜데, 굳이 내가 꽃을 건드릴 필요가 있을까. 이제 가죽제품은 무거워서 가죽 카드지갑도 안 들고 다니는 마당에 만들면 쓰기나 할까. 모든 게 무용하게 보였다. 당장 수강할 기세로 달려들었는데, 마음이 차게 식어 버렸다.
요즘 재미있게 챙겨보는 유튜브가 있다. 선우용녀 선생님의 유튜브이다. 유튜브를 볼 때마다 선우용녀 선생님처럼 즐겁게 사는 노인이 되자고, 우리네 부모님도 그러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도 이 생각을 하다가 망설이던 강좌들이 다시 떠올렸다. 당장에는 이것들이 무용해 보일 수 있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꽤 유용할 것 같았다. 재봉틀로 옷까지는 못 만들더라도 식탁보나 쿠션 정도는 만들어 내 취향대로 공간을 가꿀 수 있을 것이다. 꽃은 다 예쁘다고 뭉뚱 거리는 게 아니라 철마다 피는 꽃을 내 방에 초대해 피울 수 있을 것이다. 이것만으로 즐거운 노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생각에 마음이 스르르 바뀌었다. 지난주부터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가장 기대가 없었던 꽃꽂이 수업이 재미있었다. 선생님의 설명은 친절했고, 그의 시범은 이해하기에 좋았다. 지난 분기에 수업을 들었던 선배들은 다른 테이블에서 꽃을 다듬고 꽃꽂이를 했다. 꽃 한 송이 한 송이를 소중하게 다듬고, 집중하며 꽃꽂이를 하는 모습이 참 멋있었다. 같은 꽃으로 저마다 다른 꽃꽂이를 하는 게 신기했다. 수강자 중 나는 비교적 어린 축에 속하는 것 같았다. 나의 부모님보다 연배가 있어 보이는 분들이 많았다. 첫 수업을 마치고 나가려는데, 어떤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젊을 때 이런 거 배우는 거 보니까 참 보기 좋아요. 난 젊을 때 뭐 했나 몰라, 이제 와서 이걸 배우니. 참 재미있다. 우리 다음 주에 만나요.
할머니는 선생님에게 오늘 수업으로 참 많이 배웠다며,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셨다.
뜨끔. 이제 와서 이런 걸 배우는 것에 의미를 고민한 걸, 기껏 해야 마흔인데 세상 다 산 척했던 걸 들킨 기분이었다. 재미만 있어도 충분한 일에 효용을 따지고 들었던 게 부끄러웠다. 세상만사에 늙은이처럼 굴지 말고 너무 따지고 들지도 말아야지 생각한 한편, 선우용녀 선생님처럼 즐겁게 사시는 할머니를 만난 것 같아 마음이 푸근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