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하기 힘들 땐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의 말과 마음을 믿기로 했다
월요일 오전 11시. 햇볕이 드는 창가 책상에 앉았다. 오늘은 이 글을 써야 한다. 친구들과 매주 주제를 정해 글을 쓴다. 브런치 제목 앞에 ‘작심삼녀’라는 태그가 붙은 글이다.
‘나는 OO이 싫어’
이번 글쓰기의 주제가 유난히 어렵다. 싫은 게 너무 많아서다. 며칠 전 메모장을 펼쳐 싫어하는 것들을 나열했다. 화장, 치렁치렁한 액세서리, 낮잠, 쇼핑, 운동, 벌레, 거짓말, 생성 등 끝없이 싫어하는 게 떠올랐다. 이 중 하나를 골라 글을 써봤지만 이상하게도 글이 써지지 않아 방치한 채 며칠이 지났다.
조금 더 솔직해져야 한다. 내가 정말 싫어하는 게 뭐지. 곱씹다 보니 가닿은 곳, 바로 나다. 그래, 나는 오랫동안 나를 싫어했다.
어릴 적엔 나의 겉모습이 싫었다. 부스스한 곱슬 머리인 것도 모자라 쌍가마여서 앞 머리가 쩍쩍 갈라져 싫었다. 한 때 내 별명이 지방이었다. 눈에 살이 많고 쌍꺼풀도 없이 눈이 파묻혀 있는 것 같아 붙은 별명이다. 당연히 내 눈도 싫었다. 치열이 고르지 않아서 싫었고, 큰 얼굴이 싫었다. 가슴은 작고 엉덩이가 커서 싫었고, 다리는 짧고 두꺼운데 상체는 길어서 싫었다. 손발이 유난히 크고 통뼈라서 싫었다. 사실상 온몸이 콤플렉스였다.
언젠가부터 나의 보이지 않는 모습까지 싫었다. 성실하지 못해 초중고 내내 개근상 한 번 못 받고 툭하면 아파서 결근하는 나의 비성실성이, 새 노트를 꺼내면 끝까지 다 쓰지도 못하는 나의 얕은 끈기가, 의지는 약하면서 빽빽하게 차있는 욕심이, 남의 일에는 대문자 F로 공감하면서 나의 작은 일에도 쉽게 회초리를 들며 자책하는 내가 싫었다.
그래서였을까. 오랫동안 나를 외면했다. 허구한 날 술을 마시면서. 술자리가 좋아서도 술이 좋아서도 아니었다. 나랑 단 둘이 놀기 싫어서 술을 마셨다.
나 자신을 받아들인 건 독립을 하고 나서부터이다. 가족과 사는 게 불편하고 당시 회사가 멀어서, 단순한 이유에서 독립을 했다. 독립을 하고야 알았다. 독립은 가족과 떨어져 사는 일이 아니라 오롯이 나와 사는 일이라는 것을. 좋든 싫든 하루 종일 나인 상태로 살아야 했다. 그동안 외면해 온 나를 스스로 돌봐야 했다. 나의 생활 공간을 정돈하고, 나를 먹일 음식을 만들고 치우고, 내 몸을 씻기고 보듬는 일을 매일 반복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하게 되었다.
인정하는 것과 사랑하는 일은 또 다른 영역 같다. 나를 사랑하게 된 건,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걸 알고 나서부터이다. 그토록 싫어 한 내 외모를 현재 남편인 구남친은 자기의 이상형이라고 했다. (지금은 그 발언을 부정하지만 옛날엔 정말 그렇게 말했다.) 그는 종종 나의 외모를 놀리며 뒤집어질 듯 웃는다. 예전엔 나의 콤플렉스를 놀리는 게 화가 나고 부끄러웠는데, 이제는 그가 웃는 게 나도 웃겨서 그에게 마음껏 드러낸다. 가끔 나의 싫은 모습을 친한 사람에게 털어놓는데, 그럴 때면 기다렸다는 듯 나의 좋은 점을 얘기해 준다. 성실하지 못한 모습을 털어놓으면 내가 책임감 있게 처리한 어떤 일을 얘기해 준다. 끈기에 대한 고민을 말하면 요가나 글쓰기 등 꾸준하게 하고 있는 사례를 들어준다. 말한 건 하나씩 이루어 가는 사람이 나라며 나의 욕심을 응원해 주고, 타인에게 다정하게 말하는 건 장점이라고 칭찬해 준다.
나는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싫어했지만, 내 곁에는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았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나뿐이었단 것도 알았다. 그때부터였을까. 나를 사랑하기 힘들 땐,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의 말과 마음을 믿기로 했다. 그러자 힘이 생겼다. 나를 사랑해 줄 힘 말이다.
여전히 가끔 내가 싫다. 퇴사하고 살이 찐 게 싫고, 일도 안 하면서 피곤해하는 게 싫다. 싫은 것들이 차오르려 하면 잽싸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들도 나를 사랑해 주는데, 나도 나를 열심히 사랑해야지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