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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심삼녀_만약에 OO이 없었더라면] 여름

사계절을 여전히 축복으로 생각하고, 그중 여름을 가장 찬양한다.

by 백수쟁이

‘우리나라엔 왜 사계절이 있는 걸까요?’


고현정 유튜브에서 무더운 여름이 싫다는 자막과 함께 나온 말이다. 예전엔 사계절이 축복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아닌 것 같다며, 계절마다 옷도 다 있어야 하지 않냐며 말을 이어갔다.


만약에 이런 여름이 없다면 나의 일상은 어떨까?


구미가 당기는 과일이 없으니 평생 과일은 안 먹을 것 같다. 나는 괜찮은데, 수박을 좋아하는 남편이 조금 불쌍하다. 사진도 덜 찍게 될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여름 풍경도, 여름휴가도 없을 테니까. 아무래도 아침잠은 더 늘어나겠지? 해도 밍기적 거리며 늦게 뜨는 마당에 내가 서둘러 일어날 필요가 없으니까. 해가 짧아서 몸은 많이 사리게 될 것 같다. 어두워지면 얼른 집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스타일이라서. 여름에 유독 활기차고 긍정적이었던 모습도 사라질 것이다. ‘올해가 반이나 남았잖아!’라고 말하는 대신 ‘반 밖에 안 남았는데 뭘 더 하겠어’라고 중얼거릴 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옷은 죄다 여름옷인데, 못 입는다고 생각하니 왠지 아깝다. 오늘 중복이라고 남편이 치킨을 보내줬는데, 여름이 없으면 복날도 없겠구나. 복날을 핑계로 맛있는 음식을 많이도 먹어왔는데, 이젠 무슨 핑계로 음식을 먹어야 하나 싶다. 더운 날이 없으니 물놀이도 할 일이 없겠다. 물놀이 후 먹는 라면이나 낮잠이 정말 꿀인데, 이걸 평생 못 느끼다니 상상인데도 아쉽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든다. 몇 주 전엔 폭우로, 요즘은 열대야로 여름을 미워했다. 여름이 다 온 것 같지도 않은데, ‘이놈의 여름, 지긋지긋해! 언제 끝나나 몰라!’라며 매일 투덜댔다. 사실 여름은 죄가 없는데, 문제는 인간의 이기심과 욕심, 그리고 무관심이 만들어낸 이상 기후인데 말이다.


여전히 나는 사계절을 여전히 축복으로 생각하고, 그중 여름을 가장 찬양한다. 평소 과일에 눈길도 안 주는 내가 과일을 먹게 만드는 계절은 여름. 초록 가득한 풍경부터 핑크 빛으로 물든 노을까지 오래 간직하고 싶어 사진을 찍게 만드는 여름. 아침에 일어나기 수월하고 늦게까지 놀아도 부담 없는, 하루가 길고 긴 여름. 일 년의 반이 지나가고 나머지 반을 시작하기에 좋은 여름. 조금만 사부작 거려도 흐르는 땀에 곧잘 성취감이 생기는 여름. 추위로 이것저것 껴입고 움츠러드는 대신 더 가벼워지자고, 비워 내자고 다짐하게 만드는 여름. 이런 여름이 좋다.


얼마 전 남편이 좋아하는 수박을 샀다. 쩌억- 수박을 가르고 껍질을 잘라냈다.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통에 담았다. 예쁘게 자른 건 부모님께 드렸다. 꿀단지 꺼내듯 수박을 꺼내 틈틈이 여름의 맛을 즐겼다. 수박을 손질하고 가족과 나누며 즐기는 일은 내게, 이 여름에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일이다. 여행지와 일상에서 여름의 풍경을 틈틈이 담았다.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언젠가 구글 포토가 이 풍경을 추천해 주면 그때 또다시 이 여름을 감상하고 싶어서. 오늘도 알람 없이 일어났다. 해가 길어지니 여름 자체가 알람 시계가 된 것이다. 외출을 잘하지 않는 내가 팝업 스토어부터 뮤지컬까지 보러 나간 건, 내가 한 게 아니라 여름이 한 일이다. 여름이면 늘 무언가를 시작하는데, 이번 달부터 꽃꽂이와 재봉틀, 가죽공예를 배우고 있다.


여름이 없다는 상상을 하니 여름이어서 하게 된 것들이 참 많다는 걸 깨달았다. 날씨 때문에 잠깐이나마 여름을 미워한 게 미안하다. 기후 변화를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는 방법을 하나씩 실천해야겠다. 그리고 이 여름을 한껏 즐겨야지. 좋아, 이번 주말엔 물놀이를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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