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로써 우리는 백수 부부가 되었다.
드디어 남편이 퇴사했다. 내가 퇴사를 고민하던 시점에 그도 나와 똑같은 고민을 했다. 내가 먼저 퇴사를 한 탓에 부담이 밀려온 건지, 그의 말대로 회사 생활이 그럭저럭 할 만 해서인지 그는 퇴사를 미루었다. 그러면서도 올해가 가기 전에 퇴사를 하겠노라 했다. 그리고 지난 11월 7일, 그가 마지막 출근과 퇴근을 했다. 주말을 보내고 난 뒤 우리는 서울을 떠났다. 첫 일정은 우리 집 부모님을 만나는 것이었다. 우리 부모님은 서울에서 아주 먼 완도, 거기에서도 배를 타고 가야 하는 섬에 계신다. 너무 멀어 회사 생활을 하면서는 좀처럼 찾아 뵙기 힘든 곳에 사신다. 부모님 댁으로 찾아 뵈려 고민하다가, 함께 단풍놀이 할 겸 문경새재에서 만나기로 했다. 추석 명절에 서울에서 만나긴 했지만, 빨갛고 노란 단풍이 가득한 문경새재에서 만나니 감회가 새로웠다. 모처럼 부모님과 산책하고, 커피 한 잔하며 단풍놀이를 하는 게 참 좋았다. 남편과 내가 회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면 쉽게 하지 못할 일이었을 테니까. 우리 부모님과 여행 후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천안에 들러 호두과자를 샀다. 얼마전 SNS에서 천안 원조 호두과자집에서 말차 호두과자를 출시했다는 소식을 보았다. 평소 호두과자도 말차도 좋아해 먹어 보고 싶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우리는 하루 동안 짧은 휴식을 취했다. 나는 원고를 썼고, 그는 미루기 바빴던 일상을 챙겼다. 오랜만에 함께 심야영화도 보았다. 개봉할 때 부터 보고싶었던 영화인데, 야근이 많은 그가 시간을 내기 어려워 퇴사를 하고서야 보게 되었다. 그 다음날, 이번엔 시부모님과 여행을 갔다. 엊그제 갔던 문경새재의 단풍이 참 좋았어서 시부모님께도 보여드리고 싶었다. 지난 번엔 산책하며 문경새재를 둘러 봤는데, 이번엔 전동차를 탔다. 그리고는 단양으로 넘어갔다. 하룻밤을 보내고, 그 다음날 우연히 산 꼭대기에 있는 카페에 갔다. 단양이 처음이라 몰랐는데, 패러글라이딩 맛집이더라. 카페에서 바라보니 곳곳에서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모습을 보았다. 일본 여행에서 패러글라이딩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 하지 않아 아쉬웠는데, 한국에서도 패러글라이딩을 할 수 있는 곳이 있다니. 지금은 날씨가 너무 추워서 꺼려지지만 내년에 다시 단양에 와서 꼭 해야지, 하고 다짐했다. 여행이 끝난 뒤, 얼마간 아팠다. 감기에 걸린 것이다. 아프다는 핑계로 하루종일 누워 <나는 솔로>를 봤다. 연프(연애 프로그램)을 싫어하는 그가, 함께 보고 싶다는 나의 말에 곁눈질로 보기 시작하더니 푹 빠졌고, <나는 솔로>에 출연하고 싶다고 했다.(어쩌니 ~~ 그대는 솔로가 아닌데.)
그가 퇴사하고, 우리는 부모님을 모시고 단풍 여행을 하고, 심야영화를 보고, TV 프로그램을 봤다. 이게 뭐라고 싶지만, 나는 사실 좀 설렜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도 단풍은 쉽게 볼 수 있지만, 다른 지역에서 부모님과 단풍 놀이를 하는 건 다르니까. 심야 영화가 주는 낭만이 있지만, 내일의 피로가 미리 걱정돼 언젠가부터 피하게 되었는데 이젠 그런 걱정 없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연애, 그거 어떻게 하는 거더라? 하며 연애를 선사 시대 시절 이야기로 생각했는데, 그와 연프를 보면서 연애 훈수를 두고 지난 우리의 연애를 떠올리며 웃는 시간이 생겼으니까 설렐 수 밖에.
내가 퇴사를 하고 난 뒤, 시간이 참 많이 생겼다. 나의 시간만 많이 생겼다. 일을 하는 그에겐, 여전히 시간이 모자랐다. 야근이 잦았고, 종종 주말에도 그는 출근했다. 조금이라도 그와 함께하는 시간을 늘리고 싶어 매일 그를 회사에 바래다 주었다. 출근하는 한 시간 남짓 차 안에서 보내는 시간을 데이트라 생각하면서. 결혼하고 부부가 되었는데도 우리는 단 일주일도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각자 회사의 일 때문에 휴가를 맞춰 쓰기도 쉽지 않았다. 함께 저녁을 보내기도 어려웠다. 어떤 때는 내가, 또 다른 때는 그가 바빴다. 주말이 있긴 했지만, 잠으로 일주일 피로를 풀기 바빴고, 시간이 남을 때면 쇼핑이나 외식으로 헛헛함을 채웠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계속 퇴사를 권유했다. 맞벌이던 우리가, 남편 혼자 외벌이를 하는데도 계속해서 그에게 퇴사하고 놀자고 했다. 함께 돈은 벌지만 시간은 함께 쓰지 못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돈이 아니라 시간이니까. 그러려면 지금은 돈을, 일을 포기해야 했다. 나 혼자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도 내려놔야 했다. 그래야 함께하는 시간을 만들 수 있으니까.
40대인 우리 부부가 함께 백수가 된다는 것이 무모하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이것도 안다. 나이가 더 들어 늙어버린 우리 부부가 나중에 후회할 것이 무엇인지를. 남은 인생에서 가장 젊은 시기인 지금, 돈을 벌지 못한 것보다 시간을 벌지 못한 것을 후회할 거라고, 그래서 우리는 지금 시간을 벌어 함께하는 시간을 만들기로 했다. 어쩌면 우리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무모한 경험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