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이 여행은 오래도록 추억할 것만 같다.
내 생일을 기준으로 일주일 전과 후에 생일이 있는 친한 친구들이 있다. 나와 P, 그리고 S. 생일이 비슷하다는 건 묘한 유대감을 준다. 마치 그 시기를 함께 건너가는 동지처럼 느껴진달까. 저마다의 일과 일상으로 바쁜 우리가 모처럼 오랜만에 생일 기념 여행을 다녀왔다.
이번 여행지는 충주였다. 작년부터 내가 유독 마음을 두게 된 지역이다. 충청도 특유의 여유와 충주의 단정하고 소박한 분위기가 좋아, 서울을 떠나 살고 싶다고 생각할 때 늘 충주가 떠올랐다. 2박3일로 짧은 일정이지만, 우리에겐 충분한 시간이었다.
오랜만에 함께 떠나는 여행이니 숙소만큼은 좋은 곳에서 묵고 싶었다. 마당과 작은 정원이 있는 한옥 스타일의 독채를 골랐다. 방이 하나뿐인 걸 미처 체크하지 못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숙소가 너무나 근사하고 고즈넉했기 때문에. 짐을 풀고 나서 마당과 정원에서 사진을 찍으며 한참을 웃고 놀았다. 저녁을 먹고 숙소에서 2차를 하며 여행 첫날을 마무리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니 P는 벌써 일어나 있었다. 차를 한 잔 내려 함께 정원으로 나갔다. 아침의 정원은 더욱 고요하고 단정했다. 수크령과 강아지풀, 소나무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풍경 너머로 옆집에서 가지를 뻗은 감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주황색의 큼지막한 감이 가을을 알리고 있었다.
우리는 마당 쪽으로 난 마루로 자리를 옮겼다. P는 눈을 지그시 감고 명상을 하고, 그 옆에서 나는 책을 읽었다. 여행할 때마다 책을 챙기지만 늘 읽지 못해 돌아올 때는 짐짝처럼 느껴졌는데, 이상하게도 이날은 책이 참 잘 읽혔다. 바람은 좀 쌀쌀했지만, 햇살이 따스해 책을 읽기 좋았다. 막 깨서 부은 얼굴로 친구 S가 거실로 나왔을 때, 책과 명상으로 아침 시간을 충분히 누린 뒤였다. 배가 고파질 무렵, 오늘은 어떻게 보낼지를 의논했다. 그러다 누군가 말했다.
- 숙소도 이렇게 좋은데, 우리 굳이 밖에 나가야 할까? 점심만 나가서 먹고 오후는 숙소에서 보내는 거 어때?
이 말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세 명 모두 한마음이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산책 겸 밖으로 나섰다. 충주의 이 골목은 참 정겹다. 낮은 나무가 머리 위를 스칠 듯 자라고 있어, 부딪히지 않게 조심하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담벼락에 붙어 있는 버스 시간표부터 어느 집 창문에 붙어 있는 어린아이의 태극기 그림까지 모든 것이 다정했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우리는 각자의 공간에서 낮잠을 청했다. 한 명은 침실, 한 명은 소파, 나는 볕 잘 드는 거실에 토퍼를 깔았다. 책을 읽다 스르륵 잠들었고, 잠시 후 정신을 차리니 우리 모두 개운한 얼굴이었다. 다시 힘을 내서 장을 보고 숙소에서 바베큐를 해 먹기로 했다. 숙소에 커다란 욕조가 있어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물을 받았다. 식사 후 한 명씩 돌아가며 욕조에 몸을 담갔고, 나는 테이블에 앉아 일기를 썼다. 술과 음식, 따뜻한 욕조와 글쓰기, 그리고 무엇보다 친구들과 느긋한 대화까지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한 밤이었다.
2박3일, 충주에 머무는 동안 유명한 관광지도 이름난 카페도 찾아가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머물렀다. 좋은 공간 안에서, 좋아하는 친구들과, 각자의 속도와 컨디션에 따라. 누군가는 싱거운 여행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우리 셋은 이 여행이 정말 좋았다.
우리의 여행이 서툴렀던 시절도 있다. 무리해서 일정을 짜기도 했고, 과음으로 다음 날을 망친 적도 있으며, 하루종일 함께 있는 게 갑갑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달랐다. 무리하지 않았고, 욕심부리지 않았다. 각자의 컨디션을 존중했다. 함께 있는 시간도, 따로 있는 시간도 편안했다. 그래서 이 여행은 오래도록 추억할 것만 같다.
우리가 종종 하는 이야기가 있다. 더 나이 들면 한 동네에서 나란히 집을 짓고 살자는 이야기이다. 예전엔 이 말에 웃고 넘겼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사뭇 진심으로 상상해 보게 되었다. 함께 여행하며 서로의 결을 존중하고, 호흡을 맞출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는 건, 삶의 큰 축복이니까. 언젠가 진짜 그렇게 살게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