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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심삼녀] 2015년 8월의 내 모습 추억하기

by 백수쟁이

망할. 내가 과장만 달았어도 아니 대리만 됐어도 문을 박차고 퇴근했을텐데.


자정이 다 되었는데, 아직 회사. 퇴근을 못했다. 오늘만 그런 게 아니다. 어제도 그랬고, 내일도 분명 그럴 것이다. 광고 일을 하겠다고 다짐했을때, 어느 정도의 야근은 예상했다. 사람을 갈아넣는 공장이라는 소문이 있는 이 광고 회사는 철야에 가까운 야근이 매일 이어졌다. 사실 야근은 정말 괜찮았다. 각오했으니까. 그런데 너무 비효율적이다. 처음엔 내가 잘 하면 야근을 줄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틀렸다. 광고주의 피드백이 늦어서, 당장 대응이 필요해서 야근을 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국장님 컨펌을 받아야 하는데 그를 기다리느라 혹은 뜬구름 잡는 그의 피드백을 구체화하느라 야근을 했다. 그러나 보니 어느 순간부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야근 할 거 천천히 하자. 그렇게 나는 야근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직급만 달았어도 국장님한테 이의 제기를 좀 해볼텐데, 나는 그냥 그저그런 사원 나부랭이. 게다가 서른을 앞두고 광고 회사는 한 번 다녀봐야겠다는 일념으로 입사한, 아직 1년도 안 된 중고 신입이다. 사실 국장님 덕에 입사하였으므로 그는 내 커리어에 은인 같은 사람, 그에게 따질 게 아니라 고마워 해야 하는 입장이다.


졸린 눈을 비비고 옥상에 올라갔다. 도시의 불빛은 잦아들었는데, 우리 사무실만 여전히 환했다. 밤하늘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이 일을 얼마나 더 할 수 있을까. 광고 회사에서 내가 바라는 게 뭘까. 광고가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일하기가 싫으니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때,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그였다. 사귀는 사이이지만 우리는 통화를 잘 하지 않는데, 전화가 오니 당황스럽다. 무슨 일이 있거나 잘못 건 것 같다. 전화를 받으니 아직 회사냐며 언제 퇴근하냐고 묻는다. 나도 궁금하다, 내 퇴근 시각이. 모르겠다고 아직 한참 남았다고 답하자 회사 앞으로 오겠단다. 이런 적이 없어서 왜 그러냐고 묻는데, 별 다른 답 없이 좀 이따 잠깐 나오라는 말만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삼십 분 정도 지났을까. 그가 찾아왔다. 잠깐 차에 타란다. 차 문을 여니 꽃 한다발이 있었다. 웬 꽃이야, 했더니 오늘이 우리 500일이란다. 그를 무심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꽃을 들고 나타나다니. 500일을 생각도 못한 내가 진짜 무심하구나 싶었다. 늦은 시각이라 근처에 문 연 곳은 술집뿐, 찾다가 압구정에 버터핑커팬케익스에 갔다. 지금 같으면 자정이 다 된 시각에 뭘 먹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젊은 우리는 500일을 기념하기 위해 푸짐하게 메뉴를 시켰다. 국장님 호출이 있을까봐 맘을 졸이면서도 그와의 시간이 행복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는 다시 회사로,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의 기억은 여기까지. 언제 집에 갔는지, 일은 어떻게 마무리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새벽 즈음에 택시를 타고, 옆 자리에 꽃을 실어서 갔을 것이다. 일은 아마도 그 다음 날 또 이어서 했겠지. 그날로부터 10년이 지났다. 그 광고 회사를 그만 둔 지는 오래 되었지만, 국장님과는 종종 연락하며 지낸다. 그를 만날 때면 덕분에 광고 회사를 다닐 수 있었다고 말한다. 꽃을 건넨 그 남자친구는 4년 전, 내 남편이 되었다.


그때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예전 추억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말이다. 10년 전 사무실에서 이 야근 또한 끝이 있으며, 언젠가는 그 열정이 그리울 수도 있다는 걸 알았더라면. 그의 사랑을 의심하고 불안해하던 그 시절에 결국 우리가 결혼하게 된다는 걸 알았더라면 좋았을텐데, 하고 말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몰랐기 때문에 예전을 그리워 하기도 하고, 지금을 감사하게 여길 수도 있는 거지 싶다. 10년 후에 나는 이 시기를 어떻게 기억할까. 백수 시절을 그리워 할까. 혹 회사를 그만 둔 걸 후회하려나, 알 수 없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좋은 시기로 기억하도록 좋은 하루를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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