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남겨진 사람들의 얼굴이 슬프다.
계절이 바뀌기 무섭게 아팠다. 감기에 걸려 골골댔다. 매주 토요일이면 삼촌 병문안을 갔는데, 감기 때문에 갈 수가 없었다. 그 주 주말이 지나고 남편은 태국으로 떠났다. 남편이 없는 시간을 안식 휴가로 여기며 잘 지내고 싶었는데,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가죽 공예 수업 숙제라도 해야지 싶어서 공방을 찾아가던 길에 시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평소와 달리 택시를 불러달라는 부탁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여쭈니, 삼촌이 위독하다는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차를 돌려 시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으로 향했다. 도착했을 땐 이미 삼촌은 세상을 떠난 뒤였다.
남편의 막내 삼촌인 그의 병은 암이었다.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르지만, 8년 전부터 아팠고 완치 판정을 받았지만, 다시 재발했고, 몇 달 전부터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건 두어 달 전이었다. 그 후로 남편과 나는 주말마다 병문안을 갔다. 더 이상 치료를 할 수가 없어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했고, 장기 입원이 어려운 탓에 잠깐 머물다 퇴원하곤 했다. 다시 입원하고, 다시 퇴원하고, 그 시간이 반복되었다.
결혼 후, 나는 삼촌이 앉아 있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늘 침대에 누워있었다. 멀쩡한 사람도 하루 종일 누워 있으면 골이 아픈데, 삼촌은 얼마나 힘들까.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컨디션이 괜찮은 날이면, 그는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특히 숙모와의 연애 이야기를 많이 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연애 이야기는 나에게 들려주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아파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삼촌이 언젠가 혼자 남게 될 숙모에게 전하는 사랑 고백이라는 걸. 그녀가 그 이야기를 많이 듣고, 힘든 병간호의 기억보다 좋은 추억을 많이 간직하면 좋겠어서 삼촌이 연애 이야기를 하면 나는 이것저것 물으며 계속 그 이야기를 이어 나가길 바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목소리는 작아졌고, 말수는 줄었다. 어떤 날은 눈도 뜨지 못했다. 잠든 얼굴에 고통이 어리기도 했고, 사나운 꿈을 꾸는 듯 헛손질을 하기도 했다.
삼촌이 떠났다는 소식에, 남편은 급히 귀국했다. 남편에게 삼촌은 각별했다. 어릴 적엔 엄격했던 시아버지 대신 삼촌을 더 따랐고, 삼촌이 보여주는 비디오나 삼촌의 이야기가 참 재미있었단다. 남편이 방송 일부터 광고까지 하게 된 건 삼촌의 영향이 컸으며. 첫 월급을 타고 부모님 선물과 함께 삼촌 선물을 준비할 정도로 삼촌을 좋아했다고 한다.
공항에서 만난 남편과 삼촌 이야기를 하다 둘 다 눈물이 터져 버렸다. 어릴 적부터 짖궂은 장난을 많이 친 삼촌이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짖궂은 장난을 치는 거라고, 남편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고 했다. 장례를 치르며 참 많이 울었다. 삼촌과의 추억이라곤 최근 몇 달 동안 병문안밖에 없는데도 계속 눈물이 났다. 남겨진 사람들이 안타까워서 그랬다. 막냇동생을 떠나보내는 시어머니의 가족들이 안타까웠고, 빈소에서 정신없이 움직이던 숙모가 마지막 날에 아무도 없는 빈소에서 숨죽여 우는 모습이 안타까웠고, 꾹 참고 싶은데 터져버린 울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남편이 안타까워서 눈물이 났다.
예전엔 죽음이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슬펐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떠나보냈을 때, 그들이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에 슬펐다. 이제는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이 세상에 남겨진 사람들의 얼굴이 슬프다. 사랑하는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데, 남겨진 사람은 계속 존재해야 하는 사실이 안타깝고 슬프다. 남겨진 이들이 겪어야 할 시간과 견뎌야 할 마음이 너무나 버겁다.
몇 달간 나의 기도 제목은 삼촌이었다. 그가 덜 고통스럽기를, 평안하기를, 남은 시간을 소중하게 잘 지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이제는 남겨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겠다. 우리 모두, 너무 오래 슬퍼하지 않기를. 슬픔 너머에도 계속되는 삶을 긍정하며 사랑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