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감나무. 이 우주에 영원한 건 1도 없어
13층 아파트 베란다로 하얗게 쏟아지는 비를 햇살이(반려견)와 내려다봤다. 저기 조금만 시선을 넘기면 우리가 유년을 보내고 청년기를 보낸 본가가 있다. 올해가 지나면 그 집 위로 새로운 아파트가 쭉쭉 올라올 것이다. 왜 이렇게 주택을 허물고 아파트를 못 지어서 안달인지 모르겠다. 아파트에 살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지역이, 나라가 되어버리는 것 같다.
불과 하루 사이에 엄마가 2년 이상을 살 집은 잘 정리되어 있었다. 어제는 고층 사다리를 타고 냉장고를 들이는데 한 번 휘청해서 모두가 애간장이 녹았다했다. 비까지 하염없이 내려 모두가 혼이 나간 채로 이삿짐을 들이고 에어컨을 설치하고, 새로 산 세탁기며 가구... 여기저기 쌓여 있는 짐들. 엄마의 세간살이는 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본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치인데도 얼려온 시래기가 녹아 봉지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수많은, 무거운 이삿짐 속에서도 시래기는 놓을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다. 엄마가 그것을 고단함에도 챙겨온 것은 자식 입에 들어가는 그 찰라의 기쁨을 맛보기 위함일테니. 아직 결혼하지 않고 결혼 생각도 없고, 자식도 없는 나는 따라가지 못할 정성이다.
세 달 전 내가 이사하는 날엔 엄마가 종일 나 대신 일을 챙겼다. 정작 이사할 집에 살 나는 회사에 출근을 했으니 세상세상 이런 불효막심한 딸이 없다. 나와 달리 동생은 엄마의 동거자로서 함께 이사를 하며 불평하는 낯이 하나도 없다. 엄마를 살뜰히 챙기는 것은 물론 이사를 하다 갑자기 전기가 나가 기사를 부르기도 했고(알고보니 비에 젖은 냉장고 때문에 잠시 전기가 안 들어온 것) 오고 간 출장비 명목으로 괜한 8만 원을 쓰고, 에어컨 위치 문제로 설치 기사에게 언성을 높인 엄마 대신 사과를 하고, 자기 방은 제일 나중으로 미루고 나머지 짐들을 서둘러 정리했다. 야무지게 TV, 인터넷 약정도 LG로 바꿔서 미리 신청을 했는데 이삿날 기사가 와보고 설치불가 판단을 내렸다. 아파트를 팔고 나간 사람이 리모델링을 하며 인터넷 단자를 벽 속에 파묻고 매립을 해버린 탓. 전기선이 보기 싫어서 그랬다는 것 같은데 참 별일도 다 있지. 덕분에 LG도 난감, 동생도 난감. 아직 이 일은 해결 중이다.
창밖엔 여전히 비가 내리고 동생은 일을 챙기느라 분주하다. 폐기물 봉투에 엄마가 시킨 우유도 재빠르게 사갖고 오더니 제 방에서 LG 상담원과 통화를 한다. 동생의 목소리가 싹싹하고 질문도 야무지다. 그런 동생을 보며 엄마가 나보다 동생이랑 살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난 엄마에게 많이 의지하는 편이다. 어떤 일이 생기면 엄마에게 항상 상의하고, 좋은 일이 있으면 엄마에게 먼저 자랑하고 그렇지 않은 일도 엄마에게 이야기하며 마음을 달랜다. 이러니 엄마가 나에게 전화를 자주 하지. 밥은 먹었니. 일어났니. 집엔 언제 들어가니. 힘들어서 어쩌니. 엄마는 큰딸이 나이가 얼마를 먹었든, 사회에서 일을 어떻게 똑부러지게 하고 인정을 받든 상관 없이 내가 여전히 물가에 내놓은 아이같단다. 그래, 동생을 보니 알겠다. 나와 동생이 얼마나 다른지.
본가를 떠나는 마지막 저녁, 햇살이를 데릴러 잠시 집에 들렀었다. 수많은 밤을 보낸 우리의 집은 세입자들도 모두 떠나고, 2층 우리집도 살림을 정리하느라 마치 폐가처럼 쓸쓸하고 애잔하고, 과거의 시간 속으로 점점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미련이란 없는 사람처럼 강아지를 데리고 내 집으로 돌아왔는데, 오늘 둘째 동생이 그런 말을 한다. 엄마 집 정리 좀 하면 본가에 가서 가족사진을 찍자고. 아!
엄마의 새로운 집 베란다를 내려다보며 본가의 감나무 생각이 간절했다.
"엄마, 감나무 가지를 가져와서 물꽂이를 하면 뿌리가 내릴까?"
"안돼. 소용없어. 뽕나무도 안 되던걸."
엄마는 그제의 나처럼 미련 한 마디가 없어보였다. 그 감나무는 아빠의 엄마네서 가져온 건데. 엄마는 시엄마와 시아빠를 좋아했지. 엄마는 그 감나무를 참 아꼈다. 올해 가을에는 감나무의 감을 못 먹는가 했는데 엄마는 그 마지막 감을 추수하여 곶감을 할 거란다. 그리고 보내주려는 가보다. 영영.
재개발이 아니었으면 엄마는 노년을 그 집에서 살았을 거다.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집으로 나도 평생을 알고 살았을 거다. 하지만 삶은 뜻하지 않게 흐르고 잡을 수 없는 것들은 여기저기서 예상치 못하게 튀어나온다. 사라지는 것. 감나무, 대추나무, 2층의 계단, 우리집, 영원할 줄 알았던 집. 우리만의 세상이 되어주었던 주택에서 너와 내가 사는 아파트는 집 같으면서도 집이 아닌 것 같다. 햇살이가 짖는 소리가 밖에 새어나갈까봐 노심초사하는 마음, 본가보다 작아진 엄마의 집도 아직은 받아들일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이또한 나의 전셋집처럼 또 익숙해지는 때가 오겠지.
(feat.익숙해지기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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