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비건 지향인이 시청한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필자는 비건 지향인이다. 며칠 전 아내는 요리 경연 프로그램에서 나온 비건 요리와 요리사가 온라인상에서 화제라고 말했다. 요리 프로그램에서 동물의 살점과 뼈를 요리의 재료로 다루는 모습을 보면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특히 예능 프로그램은 유머랍시고 동물을 희화화하는 장면은 불편하다. 이러한 콘텐츠 환경 때문인지 내게 요리 경연 프로그램은 관심 밖이었다. 그런데 비건 요리라니, 놀랍기도 하면서 자연스레 관심이 생겼다.
오직 맛으로 승부를 보는 경연프로그램 '흑백요리사'
화제의 프로그램은 바로 넷플릭스 <흑백요리사>다. 흑백요리사는 소개글의 내용처럼 "오직 맛으로 승부를 걸며 치열하게 맞붙는" 요리 경연 프로그램이다. 20인의 백수저, 80인의 흑수저가 출연한다. 100인 요리사의 요리를 '더본코리아' 백종원 대표와 국내에서 유일하게 미쉐린 3스타를 받은 '모수 서울' 안성재 요리사가 평가한다.
바둑에서 둘 중 기력이 낮은 이가 흑을, 기력이 높은 이가 백을 잡는다. 바둑처럼 백수저는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진 공인된 유명 요리사다. 이름만 대면 일반인도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들이다. 심사위원으로 있어도 어색하지 않을 요리계 대가도 출연했다. 중식 대가 여경래, 백악관 국빈만찬 요리사 에드워드 리, 요리 경연 프로그램 심사위원으로 출연한 바 있는 최현석 등이다. 이뿐만 아니라 미슐랭 1스타를 받은 요리사도 다수 출연했다.
세련된 비건 양식 메뉴를 제공하는 '로컬릿'(서울 옥수동 위치) 요리사인 남정석도 백수저로 참가했다. 남정석은 국내 채소 요리 일인자로 소개되었다. 마스터 셰프 코리아 2 우승자 최강록, 한식대첩 우승자인 이영숙도 백수저다. 반면 흑수저는 이른바 '재야의 고수'다. 무명이지만 인기 음식점 요리사, 요리 유튜버 등이 출연한다.
첫 번째 경연은 흑수저 결정전이다. 백수저는 첫 경연의 부전승이며, 흑수저 80인 중 20인을 선발한다. 선발된 20인의 흑수저가 백수저와 경연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세트장은 1층은 흑수저가 음식 경연을 하는 장소로 조성했고 2층에는 스탠딩 관람석이 마련되어 백수저 출연자들이 흑수저 참가자가 요리하는 모습과 평가받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조성했다.
반전 메뉴 '비건 사시미'를 선보인 흑수저 요리사
백수저로 출연한 남정석 요리사가 비건 요리를 선보일 것으로 예상했다. 목 빠지게 기다렸다. 필자가 이 요리 경연 프로그램을 보게 된 이유는 화제의 비건 음식을 보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2화가 끝나갈 무렵, 흑수저 결정전이 진행되는 도중 비건 요리가 등장했다. 필자의 예상과는 달리 백수저인 남정석 요리사가 아닌 흑수저 '셀럽의 셰프'가 비건 요리를 처음으로 선보였다. 요리의 대가라 할 수 있는 백수저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재료 준비 시간에 요리의 주재료라고 할 수 있는 고기가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셀럽의 셰프가 요리한 음식은 '베지터블 사시미(생선회)'와 '베지터블 후토마키(일본식 김밥)'다. 요리 재료는 "시중에서, 마트에서 구할 수 있는 편안한 재료"인 표고버섯, 아보카도, 비트, 무, 콜라비, 연근 등 채소뿐이다. 편하게 구할 수 있는 재료지만 채소를 다루는 요리사의 기술은 탁월하다. 채소를 손질하고 삶고 튀기고 조리고 훈연했다.
음식의 시각적인 모습도 대단하지만 그의 인터뷰가 정말 인상 깊다. 요리의 콘셉트는 "미각적 착각"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베지터블 사시미는 채소이지만 참치 맛이 나고 전복 같기도 하다. 채소로 생선회(사시미)를 시각적으로, 미각적으로 구현했다.
이때 많은 백수저 요리사들이 안성재 심사위원이 셀럽의 셰프 요리를 평가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흑수저 결정전에서 심사위원의 평가를 보는 것도 흥미롭지만, 요리에 나름 내공이 있는 백수저의 반응과 표현을 듣는 것도 묘미가 있다.
백수저 출연자 선경은 "돈 주고 사 먹고 싶은데"라고 말했고 지켜보던 에드워드 리도 "맛보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최현석 요리사는 "저게 비트 익힌 거랑 아보카도랑 같이 있잖아요. 오도로(참치 뱃살)처럼 (비트는) 기름 맛이 약하니까. 되게 일리가 있는 거지. 되게 똑똑하네요"라고 설명했는데 마치 요리 해설위원 같았다.
드디어 안성재 심사위원이 맛을 봤다. 눈을 감고서 음미했고 모두가 숨죽여 평가 순간을 지켜봤다. 결과는 생존. 셀럽의 셰프는 아이처럼 뛰며 기뻐했다. 가짜 사시미가 진짜 미식으로 인정받는 순간 같았다. 안 심사위원은 셀럽의 셰프가 별다른 설명 없이 '눈을 감고서 맛보라'는 말이 본인에게 자유를 줬고 이를 통해 요리사가 의도한 바가 그대로 상상되었다고 말했다.
그럴 바에 진짜 고기를 먹지, 왜 가짜고기를 먹어?
대체육이나 비건 사시미와 같은 요리를 비판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태어나서 성인이 될 때까지 고기에 길들여진 입맛을 거부하고 동물권, 환경 등을 이유로 채식을 지향하려는 이들에게는 '가짜 고기'는 간절할 것이다. 이렇게라도 동물을 덜 죽일 수 있다면 이야말로 밥상 혁명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비건 요리에 가짜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건 부당하다. 가짜가 아니라 진짜다.
비건 요리는 날로 발전하고 있다. 필자가 <흑백요리사>를 통해 비건 사시미를 처음 본 건 아니었다. 약 6년 간 비건 지향인으로 살면서 몇 차례 비건 사시미와 비건 스시(초밥)를 맛봤다. 비건 스시는 사시미를 최대한 유사하게 구현했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안겨줬다. 스시의 맛이 장애물이 되어 비건이 되지 못한다고 하여 꺾인 의지를 탓할 게 아니다. 스시를 구현한 요리사에게 박수를 보내는 게 마땅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비건 뽀모도로 파스타, 비건 유린기, 비건표고탕수 등 채소 기반의 다양한 비건 요리를 시중에서 먹을 수 있다. 지금은 운영이 중단되었지만 서울 잠실의 한 식당에서 먹었던 비건 감자탕은 잊을 수가 없다.
가공식품이지만 버섯으로 만든 치킨, 곡물로 만든 대체육의 기술 수준은 정점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 이상 비건 요리에 한계는 없어 보인다.
셀럽의 셰프는 생존한 20인의 흑수저 중 유일하게 비건 요리로 통과했다. 국내 비건이 20명 중 한 명이나 되려나. 단 하나의 비건 요리라는 사실에 서글프면서도 동시에 비건 요리가 미슐랭 3스타 요리사에게 인정을 받아 덩달아 기뻤다.
이는 비건 요리가 더 이상 맛없는 요리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비건 요리도 재료의 활용과 요리사의 기술에 따라 충분히 미식이 될 수 있다.
현재(2024년 9월 23일 기준) 4화까지만 공개되었다. 5화 이후로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예상되는 남정석 요리사가 가장 기대된다. 남정석 요리사가 운영하는 로컬릿에는 논비건 음식도 있지만 '국내 채소 요리 일인자'로 소개한 만큼 어떤 채소 요리를 선보일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흑백요리사를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
비건 요리가 나온다는 소식에 '흑백요리사'를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깊은 요리의 세계를 경험했다. 요리 세계가 새삼 실용과 예술 사이에 있는 세계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창의적인 요리법이나 메뉴를 보면서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일반인인 필자는 상상도 못 할 메뉴들이 등장한다. 비건 음식이 아니어도 채소를 비롯한 비건 재료를 활용하는 다양한 방법이 나온다. 조리의 전 과정이나 노하우를 자세히 공개되지 않는다. 하지만 같은 식재료라도 어떻게 활용하는지에 따라 다채로운 음식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목격하면서 좀 더 맛있는 비건 요리를 시도해 보는 상상을 해보게 된다.
단시간 내에 뚝딱 요리를 해내고 주어진 주재료만으로 새로운 메뉴를 선보인다. 완성된 접시 하나에 올려진 메뉴에서 철학과 예술, 그리고 성실한 요리사의 삶이 그려진다. 얼마나 칼질을 반복하고 불을 다루고 식재료를 배합했겠는가. 얼마나 많은 실패를 거듭하면서 스스로 만족스러운 요리에 이르렀겠는가. 필자처럼 요리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이도 긍정적인 자극을 받게 될 것이다. 만약 당신이 맛 때문에 비건 되기를 포기한 자라면 새로운 용기를 얻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