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의 사랑> 한강 소설집 (문학과지성사, 3판 2024)
2024년 노벨문학상은 아시아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소설가 한강(1970~ )에게 수여되었다. 연세대학교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그는 1994년 단편소설 ‘붉은 닻’으로 등단한 후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소설 <희랍어 시간>,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등을 집필하며 이상문학상,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등을 수상했다. <여수의 사랑>은 1995년 발표된 한강의 첫 소설집으로 1993년부터 약 일 년 동안 쓴 작품들을 묶었다.
소설집에는 총 6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여수를 고향으로 가진 두 여자의 만남과 삶의 고단함을 그린 표제작 ‘여수의 사랑’, 친한 언니의 배신으로 독기만 남은 주인공이 겪는 신산함의 ‘어둠의 사육제’,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인물들이 탈출을 꿈꾸는 ‘야간열차’, 동네 아이들에게 맞아 죽은 동생을 잊지 못하는 형과 어머니의 이야기 ‘질주’, 가족 없는 주인공이 가족 잃은 남자의 집에서 살게 되는 ‘진달래 능선’, 죽은 아버지로 인해 방황하는 동생과 형, 어머니의 ‘붉은 닻’이다. 각각의 단편들은 ‘상실과 죽음으로 인한 고통과 우울함, 삶의 신산함’을 이야기하며 이는 소설집 전체를 관통한다.
“통곡하는 여자의 눈에서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은 빗물이 객실 차창에 여러 줄기의 빗금을 내리긋고 있었다.(중략) 누군가의 가슴이 찢어지고 그것이 영원히 아물지 않을 것 같은 빗소리가 아련한 뇌성을 삼켰다. 음산한 하늘 아래 나무들은 비바람에 뿌리 뽑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p.9)” 여수로 향하는 ‘정선’의 눈에 비치는 기차 창밖 풍경은 그녀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아내를 잃고 상심한 아버지에 의해 동반자살을 당하려다 가까스로 살아난 정선은 뿌리쳤던 여동생의 손길과 들이켰던 바닷물의 짠맛을 잊지 못한다. 가족을 모두 잃은 정선과 고아였던 ‘자흔’은 동거인이 되지만 정선의 죄책감은 극단적인 결벽증으로 현현하고 자흔에게까지 적의를 드러낸다. 「어둠의 사육제」에 등장하는 ‘영진’ 또한 믿었던 고향 언니 ‘인숙’에게 전세보증금을 뺏긴 후 이모의 집에 얹혀사는 신세가 된다. “삶이 나에게 등을 돌리자마자 나 역시 미련 없이 뒤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잘 벼린 오기 하나만을 단도처럼 가슴에 보듬은 채, 되려 제 칼날에 속살을 베이며 피 흘리고 있었다.”(p.115) 식물인간이 된 동생을 돌보며 홀로된 어머니와 전문대학에 다니는 여동생을 건사해야 하는 ‘동걸’(「야간열차」), 죽은 동생에 대한 기억으로 괴로워하는 ‘인규’(「질주」)등 작품 속의 인물들은 삶의 벼랑 끝에 몰려있다.
그러나 정선은 자흔을 만나기 위해 여수로 향하고, 영진은 인숙의 독기를 기억하기 보다는 그의 창백하고 서글픈 얼굴을 떠올린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삶의 막다른 골목에 있는 인물들은 저마다의 상처로 인해 휘청거리지만 내면의 아주 연한 한 부분을 잃지 않는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 고통을 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흔의 말간 얼굴이 그 햇빛과 먼지 속에 고요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예리한 칼날이 겨드랑이로부터 젖가슴까지의 살갗을 한 꺼풀 한 꺼풀 저미어오는 것 같은 슬픔에 나는 눈을 감아버리곤 했다.”(p.63) 작가는 삶의 주변으로 몰린 인물들의 고통과 아픔에서 눈 돌리지 않고 끝까지 응시한다. 청춘의 발랄함과는 아득히 먼, 소외된 인물들과 그들의 고통에 초점을 맞춘 그의 소설은 20대 초중반의 젊은 작가가 쓴 글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어둡고 우울하다.
소설이 발표된 1990년대는 경제적인 풍요가 이어지는 시기이기도 해 “전혀 ‘신세대적’이지 않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김병익, 초판 해설) 삶의 연약함을 드러냄으로서 인간에 대한 연민을 나타내며, 상실과 외로움, 죽음과 고통이라는 주제는 이후의 작품에서도 계속 변주되고 있다. 만약 20대의 젊은 작가가 쓴 작품으로 이 책을 만났다면 한 때의 반짝거림이나 치기라고도 치부할 수도 있었겠지만 30여년이 지난 지금, <여수의 사랑>은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한강 소설의 원류(源流)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강 작가의 작품세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궁금한 독자에게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