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 앞에 보이는 것들을 적어보자. 파란색 행주가 싱크대 줄기에 물을 틀려고 줄기를 건들면 떨어질 것처럼 걸려있다. 그 밑에는 다 뒤집지 않은 고무장갑이 늘어져 있고. 1년 6개월 전에 사놓고 거의 써본 적이 없는 로잉머신이 아직 물도 갈아져있지 않은 채로 그게 제 자리인 것 같지도 않게 세워져있는데. 이젠 꼭 그게 제자리 같다. 어제 입었는지도 모를 분홍색 반팔 티셔츠가 내가 잘 쓰지도 않으면서 처분하지 못한 의자 위에 걸려있고. 이 글을 쓰는 책상 위에는 펜이 뚜껑이 닫히지 않은 채, 몇 주 전에 읽은 책의 표지지가, 산지 1달이나 지난 에어팟 프로 박스가 노트북 바로 옆 그 자리에 1달동안 놓여져있었던 것 같고. 아. 뭐 하나라도 건들면 안될 것처럼. 꼭 그 자리를 다 지키고 있다. 카메라. 상처 소독액. 환갑잔치 때 받은 냄비받침. 다 피워서 재만 남은 향초 받침대와 앙상한 나무 손잡이, 500원 보증금을 환급받지 못한 교통카드. 15만원 주고 한 번 쓴 영상용 조명, 50만원 주고 언제 쓸지를 기다리고 있는 마이크…
가끔 나는 착각을 한다.
완벽한 것이, 나를 소중히 하는것이라고.
완벽하지 않은 것은, 나를 방치하고 내버려둔 것이라고.
글쎄. 내가 아동센터에서 본 아이들을 보면 꼭 그렇지는 않다. 우리 센터는 종로구 창신동에 있어서 다문화 아이들이 꽤 있다. 그 중에서도 네팔 출신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 태어날 때부터 한국에서 자란 여자아이 한 명이 있다. 이 친구 이름을 L이라 해보자. 오늘 센터에서 책상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젓가락으로 콕콕 찍어서 너비아니를 먹고 있는데 내 앞에 노란 티셔츠를 입은 L이 얼굴을 옆으로 살짝 책상에 기댄 채, 손으로 접시를 쓸어담듯이 너비아니를 손으로 먹고 있었다. 난 이 광경이 익숙하다. 50일간 인도와 네팔을 여행했었으니까. 한 번은 나도 센터에서 손으로 밥을 먹은 적이 있다. 이래야 음식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며.여기 아이들은 내가 밥을 손으로 먹을 때 아무도 눈치를 주지 않았다. 가장 가혹한 반응은 ‘왜 손으로 먹어요?’라는 ‘맛있어서 손으로 먹어’라고 대답할 수 있는 반응정도뿐이었다. 아마 아이들도 손으로 먹고 싶었을걸. 다시 콕, 젓가락으로 너비아니를 찍어먹는데 무언가 잊고 있던 걸 다시 기억해낸 느낌이 들었다.
L은, 센터에서 가장 더러운 아이다. 냄새가 난다거나 그런건 아니고, 선생님들에게 편하게 기대고 ‘안아주겠다’며 다가오는 걸 곧잘 잘하는 아이인데. 이 아이는 간식을 먹거나 아이스크림을 먹거나, 음료수를 먹거나 혹은 초코가 묻은 과자를 먹으면 그걸 흘리거나 꼭 손에 묻은 초코, 크림 등을 옷에 슥 슥 닦는다. 아이들 혹은 선생님은 그러면 ‘어머 L아~ 옷에 그렇게 닦으면 안되지~’ 혹은 아이들은 ‘L 옷에 다묻었다 크크크크’ 한다. 하지만 겉으로는 놀리는 이 아이들도, 옷에 크림을 좀 묻히고, 초코를 좀 닦고 싶었을걸.
가만 생각해보니. 우리 아빠의 청소습관이 떠올랐다. 내가 우리 아빠집에 가있으면, 바닥에 먼지가 쌓이나보다. 나는 아빠집에 갔던 빈도만큼, 내가 공간에 생활하면 바닥에 먼지가 쌓인다는 사실을 아빠의 잔소리로 학습했던 것 같다. 아빠는 하루라도 먼지가 집 안에 쌓여있으면 안되고. 내가 가끔 면도를 하지 않고 아빠를 보러 가면 ‘수염좀 깎아라 그게 뭐냐’ 라고 말한다던가. 신발끈이 조금이라고 풀려있는걸 참지 못하고, 그냥 가져가겠다는 몇 일 입은 옷을 기어코 손빨래를 해주고 만다. 분명 나를 소중히 해주는 걸텐데, 마음 속으로는 괜히 두들겨 맞는 기분이다.
내가 L의 이야기를 하다가 끊은 것은, 누가 더 사랑 받고 자랐는지에 대한 평가를 하지 말아야겠다는 판단에서다. 이게 심리학을 좀 귓등으로 배우거나, 혹은 상담짬밥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주로 하는 실수다. 엄마~와 아빠~가 줘야하는 사랑이 저기 어딘가에 이상적인 형태로 정해져있다는 생각방식. 그래서 아이들을 보고도 ‘저 아이는 저렇게 자랐겠네’ ‘저 아이는 부모가 저럴거야’ 라고 판단하는 방식. 과도한 보호, 과도한 방치, 과도한 조종 등이 그 아이의 행복을 좌지우지 할 것이라는 사고방식은 잠시 미뤄둬야겠다. 결국 두들겨맞는 것 같이 느껴지는 우리 아빠의 사랑도 사랑은 사랑이니까 말이다.
그럼 다시. 완벽한 것이란 있는 것일까? 취약한 것이란 있는 것일까? 옷에 다 묻히고 선생님들을 안아주며 사랑을 줄 줄도 알고 자유로운 L이 내가 생각하는 완벽한 사랑을 받은 아이인 것일까.
잠시 K이야기를 해보자. 애들이 다 제멋대로 노는 놀이시간에 혼자 피아노 콩쿨 연습을 하고 꼭 마치 어른처럼 헤어스타일도 옷도 깔끔히 챙겨입은 그 아이가 완벽한 사랑을 받은 아이인 것일까. 이렇게 아이들을 보며 누가 더 사랑을 받은 것 같니 아닌 것 같니 하며 속으로 평가하고 있는 나는, 완벽하지 못한 사랑을 받아서 이러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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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운동은 뭘까. 나를 소중히 다루는 운동은 뭘까. 내가 어릴 때부터 틈만 나면 했던 걷기가 가장 완벽하고 나를 소중히 할 수 있는 운동일까? 아니면 이번에 시작한, 점점 잘해지면 사람들에게 자랑도 할 수 있고. 성취감도 막 생기고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 만점인 클라이밍이 가장 완벽하고 나를 소중히 할 수 있는 운동일까?
묘하게 나는 이렇게 느꼈다. 클라이밍이 완벽한 운동이고, 걷기는 그냥 뭔가 내가 생존을 위해 시작한 운동같다. 그렇다고 꼭 완벽한게 ‘좋다’라는 건 아니다. 오히려 클라이밍은 완벽해서 인간적이지 않고. 걷기는 완벽하지 않아서 ‘인간적이다’ 이런 평가도 하게 된다. 클라이밍을 할 때, 잘하는 사람이 검은 띠 문제를 풀다가 나 혼자 갑자기 초록색 문제 풀려고 그 앞에 가면 약간 뻘쭘하다. 거기서 나는 어떤 ‘비인간성’을 느꼈다. ‘아니 왜 운동을 남들 의식하고 해야하는데?’ ‘이거 결국 인스타에 영상찍어서 올리려고 하는 운동 아냐?’. 나는 그 날 클라이밍 한 달 권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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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완벽함이란 없고, 다만 취약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손가락에 묻은 초코송이를 옷에 그냥 묻히는 취약함. 집의 물건들이 너저분하게 자리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취약함. 클라이밍 고수 다음에 도전하러 들어가기 뻘쭘해하는 취약함. 우리는 결국 그 취약함 속에서 산다. 취약함을 좀 감추기 위해 깨끗이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먹는 방법을 익히고, 취약함을 좀 감추기 위해 매일 아침 이불을 개는 습관을 실천한다. 취약함을 좀 감추기 위해 더 나은 클라이머가 되기 위해 하루하루 노력한다. 취약함을 감추고자 하는 것. 이것이 완벽함이다. 취약한 그대로 그냥 있어보는 것. 그것은 그냥 취약함이다.
이렇게 바라보니 취약함이라는 단어에도 약간 의문이 생긴다.
취약함을 감추는게 완벽함이라면, 완벽함 또한 취약함이다. 취약함을 견디는게 취약함이면, 취약함은 그냥 있는 그대로의 존재 상태. 지금 내 집의 모습. 손에 묻은 초코송이. 다음 도전을 위해 열심히 루트를 찾는 나의 모습이다. 나는 이 상태를 취약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완벽해지려고 노력하고. 나는 완벽해지려고 노력하는게 취약함을 감추려고 하는 것 같아 그냥 취약함에 머물려고 ‘또’ 노력한다. 이 취약함에 머무려고 노력하는 것에서 또 다른 완벽주의가 생성된다. 완벽한 것들은 잘못된거야. 비인간적이야. 그니까 걷기만하고, 초코송이 옷에 묻히고, 집 청소 안해도 잘 살 수 있어야 해. 이 순간 취약함은 완벽함이 된다.
연민. 그래 나는 연민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제 자리를 잡고 있는 집의 너저분한 물건들을 그대로 둬도 나는 괜찮고. 그 상태가 약간 부끄러워 깔끔하게 정리해도 괜찮다. 먹고 있던 초코송이를 옷에 좀 묻혀도 나는 괜찮고. 엄마가 빨래할 것을 걱정하거나 다른 사람 시선을 의식하여 묻히지 않기 위해 노력해도 괜찮다. 검은띠 미션 하던 사람 다음에 초록띠 미션하는 나도 괜찮고, 괜히 창피당하는 것 같아 열심히 구석탱이에서 기본 미션을 연습하는 나도 괜찮다.
모두 괜찮다. 결국 우린 모두 취약하니까. 그 취약함 속에서 그 취약함을 견디기 위해 살아가니까. 그래서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