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이롭게 사랑해

두 번째 산티아고 순례길 중에 -3-

by 김상혁

11. 28.

외국인 와중에 한국어로 일기를 쓰니 못알아봐서 좋다. 글을 앞으로는 펜으로 써야 하니 글쓰기 모임이 벌써 걱정인데. 괜찮아. 그에 맞춰 더 신중한 글을 쓸 수 있겠지. 무엇보다 행복한 건 내가 같이여도 혼자여도 만족하고 있다는 것. 분별하는 힘이 더 생겼다는 것.


11.29

하루하루 기록하는 것이 익숙하구나.

나를 내가 찾아주는 느낌이다.

이 길 위에서도 참 다양한 사람이 존재하는데. 그 다양함 속에서 나는 더 진실된 사람들을 분별한다.

그 힘이 내 일상 속에서도 가득하길. 따라서 더 풍요로운 혼자의 시간이 내게 쏟아진다면 좋겠다.


죄책감과 수치심에 짓눌린 시간은 지나가길.

그 느낌들을 수용하고. 혹은 헤쳐 나가는 강인한 내가 있기를.


포르투에서 느꼈던 강한 분노감과 수치, 치욕스러움도 지나갔다. 내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나의 상처와 내 진짜 모습을 드러내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11.30

마지막 날이다. 오래 전이 기억 났다.

기억이 없는 기억. 그때의 풍경. 내 감정. 내 상태. 사건.

대부분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 때 숲이 되게 싫었는데. 무거운 짐때문인지도.

지금은 평화롭고. 굳이 다른 풍경과 비교하지 않는다.


누구나 더 자기 삶을 끌고 와 이 길을 걷는다.

나만 이 길 위에서 삶을 두고 끙끙 대는게 아니란 걸 기억해.

모두가 각자의 삶이 있어. 모두가 고통 속에 살아가.


마지막 날이라고 특별한가. 삶은 계속 되는데. 더 자유로워 질텐데.


확실히 처음의 나와는 달라. 그때는 새로운 모험을 하기도 싫고 엄청 무거웠는데. 지금은 내가 할 수 있으면 하잖아.


나를 계속 알아가자. 참된 행복을 직시하자. 껍데기를 경계하자. 무엇이 진정 참된 행복인지 알아차리자.


12. 1

산티아고에 오늘 도착한다. 한달간 걸은 걸음을 보상받는다는 느낌 보다는 오늘도 길이 시작되는 느낌. 5년 전엔 일단 가고보자. 빨리 해치우자의 관점이었던 것 같다.


오늘은 가볍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다.

알베르게가 호스텔이나 호텔보다 편하다.

서로가 각자인 채로 각자의 영역을 존중한 채 함께인 느낌.


순간 순간 나의 느낌을 따르자.

돈은 조금만 벌면 돼. 만족스러운 하루를 살고.

하루하루 성장하고. 하루하루 다시 태어나자.


나 자신을 아끼고. 나 자신을 사랑하고. 다른 존재를 아끼고 사랑하자.

눈으로 귀로. 입으로 심장으로 감각하는 이 길을 따라가자. 길을 잃어도 괜찮다.

내 마음에 귀를 기울여. 내 심장소리에.


오늘은 더 좋은 오늘이 기다리고 있어.

너는 사랑스러운 존재야. 너는 기쁨을 누릴 존재야.

더 깊이 들어가. 네 자신을 경이롭게 사랑해.


*


처음 이 성당을 봤을 때 약간의 감격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감격은 이 성당에 있지 않다.

이 길 위에 있지 않다.


다만 그 감격은 5년 전 나를 위한 감격이었던 것 같다.

후다닥. 도망치듯. 이 성당을 떠난 내가 다시 돌아왔잖아.

그 때 보다 짐은 세 배 더 가볍고

그 때 보다 기쁨과 여유는 세 배 더 크다.



여기 온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안다. 이제 걸을 길이 이 곳에서는. 없다는 것.

다 끝났다. 새로운 여정이 남았다.


훨씬 가벼움을 느낀다. 나를 연결짓는 건 이제 나라는 의식. 공간과 시간을 뛰어넘는 나의 연속성. 함부로 미래의 나를 지금 단정짓지 말고. 함부로 지금의 나를 평가하지 말자. 계속 살아갈 뿐. 주어진 것이 최선의 행복임을. 최선의 행복은 언제든지/어디에서든지 주어질 것임을. 부디 계속 기억해줘 상혁아.


고생했다. 30일간. 어딘가의 나의 말을 들어주느라. 이제 조금 더 평화롭고 자유롭게. 하루하루. 그 날 주어진 의미를 충실히 살아내렴.


시간을 더 펼쳐내. 네가 보고 싶었던 저 성당을.

몇 번이고 다시 쳐다봐. 다신 보고 싶어지지 않을만큼.

그래서 다시 보고 싶어질 만큼.


사진을 아무리 찍은들, 이 순간이 담길까? 아니 이 순간이 과연 기념할 전부일까?

그건 아닐걸.

지금까지 걸어온 모든 순간들이 곳곳에 더 강렬하게 기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공허하다. 이런 생각들이. 이런 통찰들이. 이런 혼잣말들이.

사람을 두고 이야기해야겠다. 내가 겪은 현실들을 향해 말해야겠다.


그럼 뭐가 되지? 모르지. 해보면 알겠지. 내일 다시 돌아와. 알겠지?

오늘 더 따뜻하게 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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