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a엄마의 보호자
2023년 7월 12일,
엄마의 항암치료가 최종적으로 중단되고, 호스피스를 앞두고 있던 날
아주 작고 낡은 영구임대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33평의 넓고 쾌적한 새아파트로 이사했다.
오늘로써 딱 1년 전의 일이다.
작년 6월 말,
덤덤하고 감정없이 건낸 주치담당간호사의 '호스피스 권유' 는 마치 여행사의 여행상품을 제안받듯 아무렇지 않게 듣게 되었다.
지난 1년 6개월을 쉼없이 달려왔는데 결국엔 손을 쓸 수 없게 되다니...
자신있게 수술을 권유한 담당의사가 야속하기만 했다.
항암치료를 했으니 1년 6개월을 버틸 수 있지않았겠냐는 생각도 들었지만 안했다면 조금 더 엄마가 건강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엄마는 머리가 다 빠지고, 쇠약한 몰골의 숨만 붙어있는 시체와 다름 없었다.
간호사로부터 '호스피스 선택'과 나의 결정을 앞둔 시점에서 나는 그 어떤 의견도 나눌 보호자가 없었다.
오로지 나의 선택만 답이였고, 나의 생각만 가능했다.
마지막 항암치료인지 모른 채 환자복을 갈아입은 엄마를 앞에 두고 뭐라 말해야할 지 몰랐다.
'엄마, 항암치료 이제 못한대, 호스피스 치료밖에 안남았대'
이 말은 '이제 현대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대' 라는 말과 같고, 죽음을 맞이해야한다는 길 밖에 없었기 때문에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어렵게 뗀 말에 엄마는 아주 덤덤하고 태연했다.
'잘 됫네 , 이제 병원 와서 주사 맞을 일 없네 ㅎㅎㅎ'
이미 항암치료의 부작용으로 혈관이 망가져있었고, 주사바늘을 꼽을 팔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멍투성이 인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면서 엄마는 기쁜 소식을 접한 사람마냥 좋아했다.
호스피스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가정치료와 병원입원치료를 결정해야만 했는데 병원에 있기 보다는 편안한 집에서 엄마를 좀 쉬게 해주고 싶었다.
부동산 시장이 좋지 않은 시기에서 이사는 무리였지만, 얼마가 될 지 모르는 상황에서 엄마를 조금이나마 넓고 쾌적한 곳에서 쉬게 해주고 싶었다.
엄마의 낡은 지갑에는 소원에 3가지 적힌 쪽지가 있다.
1. 20평 이상의 아파트로 이사
2. 정수기
3. 쇼파와 침대
평생 소원이라고 들고다닌 쪽지가 새종이 마냥 깨끗했다.
소원에 부정이라도 탈까 소중하게 여긴 모양이다.
나는 엄마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더운 대구의 여름이였지만 부동산을 이리저리 뛰면서 집을 알아보았고, 마치 나의 간절함을 누가 알기라도 하듯이 모든 조건에 맞는 집을 구할 수 있었다.
엄마에게 소식을 전하니 어안이 벙벙한지, 약 기운으로 몽롱한 가운데에도 신나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원하던 소원을 죽음의 문턱 앞에서 이루게 되다니 이루말할 수 없이 좋다고 했다.
이사일정이 정해지고, 나는 서울과 대구를 오가면서 이삿짐센터와 폐기물업체, 입주청소를 알아보았고
엄마도 함께 케어해야했다.
몸무게가 순식간에 8키로가 빠졌지만, 마음만은 상쾌하고 좋았다.
본인 몸을 건사하는 것도 힘들지만, 엄마는 힘을 내서 이사짐 싸는 것을 도왔다.
17년간 묵은 살림살이들을 다 꺼내고, 버리지 못하는 병이 있는 엄마는 여전히 버리질 못했지만
최대한 짐을 가볍게 이동하기로 했다.
어린 시절 엄마에게 적었던 편지, 어버이날 선물, 첫 월급을 받아 드렸던 용돈을 담은 봉투,...
별의 별 물건들이 쏟아졌지만 엄마에게 소중한 물건이였기 때문에 마음 한 켠이 아려왔다.
그렇게 이사 전 날이 흘러갔다.
새로 이사한 집은 고층아파트에 지은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신축아파트였다.
세상에 이런 좋은 집은 처음봤다며 엄마가 아이처럼 좋아했다.
8평 남짓한 어두운 영구임대아파트에 살다가 33평 아파트에 왔으니 그럴만도 했다.
이사 첫 날은 새로 구입한 가구가 도착하지 않아서 맨 바닥에 매트를 깔고 엄마를 눕혔다.
딱딱한 마룻바닥이지만 호텔이라도 온 것 마냥 엄마가 편안하게 잠을 잤다.
아무것도 없는 넓디 넓은 방안에서 엄마랑 잤던 그 날을 잊지 못한다.
정수기는 설치하지 못했지만 엄마의 또 다른 친구인 TV도 거실과 안방에 크게 넣어서 엄마의 적적함을 달래주기로 했다.
여기저기 굴러도 넓은 공간과 쾌적한 환경에서 엄마의 호스피스치료가 시작되었고, 일주일에 2번 가정방문 간호사가 돌봐주러 왔다.
대구에서 출근 준비를 할 때면 엄마가 일찌감치 일어나서 출근 준비하는 것을 물끄러미 봤다.
아주 오랫동안 꿈꿔왔던 순간이였다.
영구임대아파트에 살 때는 방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 내 방' 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엄마가 새벽에 출근해야했기 때문에 나의 출근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엄마가 화장하는 나를 봐주고, 옷도 골라주고, 오늘도 기운내서 일 잘 하고 오라고 출근마중도 해주었다.
너무 행복한 순간이였다.
엄마는 이 방에 누웠다가, 저 방에 누웠다가, 멍 하니 하늘을 보기도 하고, 쇼파에 누워서 TV도 보곤 했다.
항암치료를 중단했기 때문에 시간이 갈 수록 암세포가 활발하게 움직여서 마약진통제를 먹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게되었지만 마음만은 편안하다고 했다.
서울과 대구를 출퇴근 했던 나는,
밤 기차로 새벽에 도착했는데, 그때마다 엄마가 잠을 설쳐가며 나를 기다려주었다.
'미야 왔나~~~' 하면서 쇼파에 누워서 반쯤 뜬 눈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반겨주었다.
점점 더 엄마는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지만, 여전히 나를 사랑해주고 아낌없이 주었다.
그렇게 엄마는 한달 남짓 새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호스피스 병원으로 입원했다.
이제 진짜 죽음을 맞이하러 가야했기 때문이다.
구급차에 실려가던 날,
엄마가 통증을 참으며 울면서 말했다.
'미야.. 나 이 집에 다시 살아서 올 수 있어?'
' ..... 얼른 (병원)가자'
비가 억쑤같이 쏟아지던 장마가 한창이던 날,
그렇게 엄마는 집을 나섰고,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
이제 겨우 1년이 지났다.
아직도 대구집에 현관문을 열고 갈 때면 엄마가 반겨줄 것만 같고, 엄마 목소리가 귀에 맴돌아 힘들다.
어딘가에 엄마가 살아있을 것 같고, 시간이 지나면 아무렇지 않게 나타날 것만 같다.
1년 전 오늘은... 엄마가 살아있었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오늘은 엄마가 죽었다.
그러한 사실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지만, 오늘 밤 꿈에는 엄마가 나타났으면 좋겠다.
엄마가 너무 보고싶은 여름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