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a엄마의 보호자
첫 항암치료를 시작으로
엄마는 1년 6개월 동안 총 18번의 항암치료를 받았다.
내가 암환자의 보호자가 되기 전 까지는
'항암치료'라는 단어가 주는 무서움과 낯섦이 컸는데 우리가 흔히 몸살기운이 있을 때 수액치료를 받는 것과 같다.
암 종류에 따라 투여하는 약물도 수량도 각각 다르겠지만 공통적으로 영양수액이 담긴 투명한 팩이 아니라
500ml 정도 되는 불투명한 갈색 유리병에 붉은 비닐이 씌워져 있고 병에는 해골모양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항암제를 투여하는 간호사들조차도 장갑을 끼고 병을 만지고, 생겨먹은 것부터 범상치 않게 생겼다.
항암제라는 걸 처음 볼 때만 해도 범상치 않게 생긴 약체가 한 방울씩 엄마 몸에 들어갈 때마다 엄마를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그런 것이라는 게 무서웠다.
어떤 부작용이 나타날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저 약물이 엄마 몸에 잘 맞아서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만 있다면 그걸로 되었다.
153센티에 35킬로가 나가는 작은 체구의 엄마가 항암제를 버틸 수 있을지 늘 불안했다.
1차 항암치료가 끝난 후, 엄마를 신혼집으로 모셨다.
퇴원한 다음 날, 엄마의 괴성과 울음소리에 잠에서 깼다.
엄마는 고통 속에서 숨을 헐떡였다. 항암제가 암세포에 반응했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 앞에서 울면 안 되었기 때문에 무섭고 두려웠지만 울지 않았다.
침착하게 병원에서 안내해 준 대로 따랐고, 통증을 완화시키는 마약을 엄마 입으로 밀어 넣었다.
"엄마, 곧 괜찮아질 거야. 지금 엄마 몸에서 암세포랑 전쟁하고 있나 봐!
우리 이길 수 있도록 밥도 넣어주고, 운동도 하자!"
항암 2차, 3차... 6차...
엄마는 약한 몸이었지만 단 한 번도 그 후로 무서워하거나 두려움 없이 항암제를 맞았고,
그렇게 우리는 18번의 고비를 넘겼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엄마도 처음 겪어보는 것들에 많이 두려웠을 텐데 본인의 두려움이 딸에게 누가 될까 봐 참았던 것 같다.
항암제가 잘 투여될 수 있도록 몸에 꼽는 바늘은 아주 두껍고 컸다.
하지만 항암치료가 거듭할수록 백혈구 수치가 오르지 않았고, 온몸은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특히 엄마는 혈관통으로 너무 힘들어했다. 하지만 버텼다.
그때마다 마음이 녹아내리듯이 힘들었지만 내가 해줄 수 없는 게 더 힘들었다.
그때의 엄마와 나는 이 시간들이 지나가기만을 버티는 것 밖에 없었다.
평소 마음의 위안을 얻는 한 강사의 강의에서
‘참는 역할이 암에 걸릴 확률이 높다’라는 말을 들었다.
가슴 한편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엄마는 대구에서 태어났고, 부산으로 시집을 갔다.
지금은 대구와 부산이 1시간 반도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였지만 90년대만 해도 가깝지 않았다.
하지만 부산으로 시집 가 얼마되지 않아 대구로 다시 돌아왔다.
남편의 가정폭력과 내가 태어남 조차도 축하해주지 않는 시댁식구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 당시는 시집간 여자가 다시 친정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그리 '명예롭게' 봐주지 않는 사회였다.
나는 아버지와 친가식구들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태어났지만 자라는 동안 엄마와 외가식구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자랐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을 몰랐지만 빈자리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외가식구들은 대가족은 아니었지만 '아비 없는 딸' '남편 없는 과부의 딸'이라고 행여 손가락질받을까 걱정했지만 순수하고 대가 없는 내리사랑으로 내 어린 시절을 꽉 채워주었다.
당시 30살의 엄마는 갓 태어난 40일 된 딸을 데리고 이혼을 했고, 그 후로 억척스럽고 악착같이 살았다.
90년대만 해도 '보험'이라는 개념이 대중화되기 전에 보험계의 블루오션을 꿈꾼 엄마는 보험왕이 되었다.
하지만 모든 게 본인의 커리어를 쌓기 위해서도 아니었고 오롯하게 ‘딸’을 위해서였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사회문화였기 때문에 여자가, 그리고 과부가 유리천장을 뚫기에는 쉽지 않았다.
철없고 순수했던 나는, 그저 엄마의 퇴근시간만 기다렸고, 퇴근길에 사 오는 맛있는 간식만 기다렸다
그리고 출근하는 엄마 가랑이를 붙잡고 가지 말고 나랑 놀자고 대성통곡하는 그런 딸이었다.
지금 사회인이 되어서 그때의 엄마를 생각해 보면 온갖 꼰대들 속에서 '집에서 딸이 기다리고 있으니 가야 한다 ‘라고 상사에게 이야기하면서 눈칫밥 먹으면서 퇴근하는 엄마의 모습이 얼마나 힘들고 지쳤을지 감히 가늠이 되지 않는다.
자가용도 없고, 지하철도 없던 그 시절에
버스를 타고, 춥고 더운 길을 걸어가고, 보험쟁이 왔다고 문전박대하는 거래처들을 상대하며
구두 속에 퉁퉁 부어있는 발과 세상에 지쳐있는 엄마의 몸을 어린 나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엄마는 주말마다 나와 시간을 보내주었다.
항상 때가 되면 예쁜 곳을 같이 소풍 갔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때의 나를 사진으로 남겨주었다.
그리고 항상 "내 딸 미야"라고 불러주었다.
그리고 매달 한 번
동네 치킨집에 전화해서 양념치킨을 시켜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한 달 내내 부은 발을 부여잡으면서 겨우 벌었던 월급날이었다.
내가 점점 커가면서 엄마는 독해졌다.
흔히 말하는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동네에서 손가락질받지 않게 하려고 외동딸에게 회초리를 드는 날이 많았다.
한번 혼나기 시작하면 밤 10시 넘기 일쑤였다.
애 잡는다고 몇 번이나 외할머니가 말리기도 했다. 나는 그런 엄마가 무섭고 견디는 게 힘들었다.
그렇게 혼나서 울며 잠든 날이면 어렴풋하게 엄마가 우는 모습도 본 것 같다.
엄마는 회사에서 인정을 받는 직원이었다.
성실함이 유전자에 탑재되어 있던 터라 근면성실한 모습이 싱글맘에게 큰 점수가 되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스트레스를 풀 곳이 없으니 어린 딸에게 퍼부었던 것 같다.
사실 그때 내 마음이 많이 다쳤다.
IMF가 터지고 엄마는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되었다.
딸이 초등학교 입학을 해야 했기에 엄마는 쉴 수가 없었는데, 애 딸린 여자를 채용해 주는 곳이 마땅치 않았다.
이력서를 돌리고, 벼룩시장 내 구인광고를 뒤지는 엄마 모습이 기억난다.
그 후 백화점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나가야만 했던 엄마는 하루에도 수십 번 진상고객들을 상대하면서
텃세 짱짱한 백화점 직원과 소통하면서 견뎌냈다.
나는 그런 엄마가 백화점 아르바이트생인 줄도 모르고, 백화점에 나가는 엄마가 멋져 보였고,
주말이 되면 엄마의 퇴근시간에 맞추어 동성로 시내 데이트하는 게 좋았고, 백화점 음식과 물건들을 사 오는 엄마가 멋있었다.
그게 백화점 떨이식품, 떨이제품들이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엄마는 인정받았다.
성실하고 잘 참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엄마는 언제 잘릴지도 모르는 계약직 아르바이트생으로 어린 딸아이를 중학생까지 키워냈다.
덕분에 나는 부족함도 없이, 세상에 걱정은 없이, 순수하고 행복한 사춘기 시절을 보냈다.
아마도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이 아닐까 한다.
그 후로 엄마는 아는 분의 소개로 청소용역업체에 들어갔고 20년 동안 은행청소부로 근무를 했다.
20년 동안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새벽 5시에 출근했고 , 단 한 번도 휴가를 쓰지 않고 일을 했다.
본인이 휴가를 쓰면 객장이 더러워진다는 이유였다.
비가 오거나 날이 짓궂으면 엄마는 2배로 일이 힘들어졌다.
하지만 엄마는 단 하루도 지각없이 20년을 근속했다.
그 사이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왔고, 운이 좋게 나도 은행원으로 취업했다.
엄마와 같은 은행에, 엄마는 청소부, 딸은 은행원으로 말이다.
엄마와 같은 곳에서 비밀연애를 하듯 아무도 모르게 우리만의 싸인을 주고받으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날’ 도 그런 날이었다.
장맛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은행입구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아무리 닦아도 세차게 내리는 비와 발자국을 지워낼 수 없었다.
물기가 있던 대리석 바닥은 미끄러웠고, 하필이면 교양 없는 졸부스타일의 아줌마가 살짝 미끄러졌다.
가래 끓는 두꺼운 목소리의 그 졸부는 연신 미안하다고 머리를 조아리는 청소부에게
‘아줌마! 내 같은 사람이 있어서 아줌마가 일할 수 있는 거예요’라고 했다.
굽신거리는 아줌마는 엄마였다...
---------------------------------------
진심으로 조아리는 청소부의 모습을 보며 다행히도 그 졸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돌아섰지만
나는 자리에 앉아 그 모습을 보면서 엄마가 그동안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은 설움과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것 같았다.
땀인지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르는 것이 엄마 얼굴에 가득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엄마는 개의치 않았다.
참는 것이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참고 참고 또 참고...
20년간 청소부로 일했던 엄마는 정년퇴직 6개월을 앞두고 암선고를 받았다.
어릴 때 읽은 동화책에는 착하고 성실하게 살면 제비가 박 씨를 물어다 주어 금은보화를 가져다준다고 했는데
그 모든 순간이 물거품이 되었다.
정년퇴임을 하면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화사한 옷을 입고,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가고 싶다는 엄마의 꿈이 사라졌다.
엄마의 지갑 속에 아주 오랫동안 간직한 소원리스트가 있다.
'정수기, 소파, 침대가 있는 20평대 집'
단칸방에 살았던 두 모녀가 꿈꾸는 삶이었다.
참으로 세상에는 신이 없다고 느끼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