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a엄마의 보호자
엄마는 항암치료를 시작한 지 1년 6개월만에 항암치료 18차를 마지막으로 치료를 중단했다.
항암제도 듣지 않을 뿐더러 이미 전이가 또 시작이 되었고, 고관절까지 퍼진 암세포는 다리신경을 눌러서 코끼리 다리가 되어있었다.
220의 신발사이즈는 발이 들어가지 않고, 부어오르다 못해 불어터진 엄마의 다리는 핏줄이 터져서 힘들었다. 게다가 자궁적출한 부위로 추가전이가 시작되어 하혈을 계속해서 기저귀를 차고 다녀야만 했다.
다행스럽게도 당뇨나 혈압이 없었기 때문에 지난 항암치료 기간동안 엄마는 계속 운동을 하면서 몸을 관리했다. 하지만 암세포는 엄마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았다.
평소에 걷는 운동을 하는 걸 참 좋아했던 엄마는, 가을 단풍이 눈부셨던 날이 마지막 외출이 되었다.
부풀어오른 다리 때문에 걷질 못하게 되었고, 외부활동을 전혀 못해서 건강상태가 점점 더 악화되었고, 엄마의 멘탈도 무너져내렸다.
나는 서울의 회사와 대구집을 매일 기차로 출퇴근 하면서 엄마를 케어했다. 기차 안에서 이동하는 순간만은 유일하게 내가 쉴 수 있는 시간이였다.
17년간 살았던 단칸방의 영구임대아파트를 벗어나 동대구역 근처에 집을 이사했다.
무너진 엄마의 마음에 다시 희망이 싹트는 순간이였다.
햇빛이 잘 들고, 전망이 탁 트인 넓은 30평대의 신축 아파트로 이사온 날, 엄마는 더이상 암환자가 아니라 소녀가 되었다.
가구가 아직 도착하지 않아 첫 날은 빈 방에 덩그러니 둘이서 잠이 들었다.
맨 바닥이였지만 그렇게 꿀잠을 잔 적이 오랜만이였다.
새 집에 이사온 후, 가정호스피스를 시작했다.
항암치료를 중단했기 때문에 호스피스로 전원을 해야했지만, 보호자가 상주를 해야하기 때문에 생업을 버리고 엄마와 함께 병원에 갇혀서 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직 엄마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가정호스피스를 시작한 지 한달 째, 엄마는 병원으로 갔다.
암세포는 엄마에게 좋은 집에서 지내는 호사를 오래 두고봐주지 않았다.
비가 억쑤같이 내리던 여름 날, 그렇게 엄마는 병원 호스피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게 새 집에서 머물렀던 마지막 날이였다.
병원으로 실려가는 날, 고통에 숨을 헐떡이며 엄마가 말했다.
"나 다시 여기 살아서 올 수 있어?"
차마 목이 메여 대답할 수 없었다.
엄마의 시간이 그렇게 길게 남지 않음이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엄마를 떠나보내야 하는 시간이 가까워 오는 것도, 혼자서 인륜지대사를 헤쳐나가야 하기 때문에 사실 모든 것이 두렵다. 장례를 혼자서 치뤄본 적도, 누구에게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늘 그래왔듯 엄마를 세상에 만나러 올 때도, 엄마를 세상에서 떠나보낼 때도 나 혼자다.
딸을 혼자 세상에 남겨두고 멀리 가야하는 엄마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안하고 안심하고 갈 수 있도록 하나씩, 하나씩, 걸음걸이 배워나갔다.
혹시나 내가 장례를 준비하는 과정이 엄마에게 상처가 되진 않을까 싶어 쉽사리 '엄마 나 이거이거 준비해뒀어'라고 말을 할 수가 없다. 부처든, 예수든, 어떤 신이든 죽음 앞에서는 두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하루아침에 시한부 암환자가 되어 힘겨운 수술과 항암치료를 했지만 나아지지 않고, 호스피스 병동의 차가운 천장만 보면서 죽음이 부를 때 까지 하루하루 기다리는 엄마의 심정을 나는 감히 상상할 수 조차 없다.
고향은 대구지만 서울에서 계속 살아야해서 엄마의 납골당도 수도권으로 예약을 해두었다.
날씨가 아주 쾌청했던 날 납골당을 예약하면서 기분이 참 묘했다.
겨우 가로 60센티 남짓의 네모난 칸이 얼마나 비싸던지, 정작 죽은 사람은 알지도 못하는데 산 자가 마음 편하기 위해서 쓰는 돈은 아닌지 생각했다.
납골당 예약을 하고 같은 주에 엄마의 수의를 주문했다.
어차피 화장할 거라 장례식에 있는 거 대충 쓰면 된다고 했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가 세상에 태어날 때 엄마가 열 달을 품으면서 베넷저고리를 준비하고, 세상에 올 순간을 꼽으면서 설래였던 그 마음에 보답하고 싶었다.
자식 된 입장에서 먼저 가는 부모의 마지막 옷을 곱게, 정성스럽게 입혀드리고 싶었다.
평소에 사치도 없이 검정색 락스 묻은 옷만 입고 다니다가 퇴직하면 꽃무늬 옷에 빨간 립스틱을 바르겠다고 설래하던 엄마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환자복만 입고 1년 6개월간 살았는데, 대충 파는 옷을 입혀서 보내고 싶지 않았다.
물어볼 이가 없으니 내 선택만이 정답이다 생각했다.
납골당과 수의를 고르며 느낀 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가족의 죽음을 준비하고있고, 본인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손을 잡고 가족끼리 마치 소풍오듯 납골당을 찾아 본인들이 죽어서 들어 갈 봉안당의 위치, 유골함 등을 보러온다거나 부모의 장수를 기원하며 윤달에 수의를 미리 준비하는 것,
문득, 나는 저런 걸 준비해두지 못해서 이렇게 엄마가 빨리가나 생각했다.
주문한 수의가 하루만에 도착했다.
거칠고 누런색의 삼베원단 말고, 평소 엄마가 좋아하는 부드러운 원단의 것을 주문했다.
색상도 맑고, 청아했다.
저것을 입고 마지막으로 소천할 엄마의 모습은 아름다울 것 같다.
엄마는 늘 청소부일을 했기 때문에 옷이 어두웠다. 그리고 옷에는 군데군데 락스물이 튀어서 희끗희끗한 얼굴이 많았다. 땀이 많아서 고급소재의 옷보다는 시장에서 파는 싼 옷을 입었다.
내가 돈을벌기 시작하면서 계절마다 백화점에 가, 비싼 소재의 옷을 사주었지만 엄마는 그게 마치 전시품인냥 옷걸이에 전시만 해둘 뿐이였다.
그게 참 꼴보기 싫고 청승맞아 보여서 화를 낸 적도 많았다.
그때마다 엄마는 '나중에 퇴직하면 원없이 입을거다' 라고 되받았다.
그래서 엄마 수의는 최대한 밝은 옷을 선택하고 싶었고 수수하고, 선했던 엄마의 마음을 잘 보여주는 옷이였다. 깔끔하게 포장된 수의박스를 떨리는 손으로 , 그리고 참으로 무거운 마음으로 열어보았다.
정갈하게 각잡힌 듯 놓여있는 수의는 감히 내 손으로 만지지도 못하게 맑았다.
엄마에게 자랑도 하고 싶었지만행여 엄마가 죽음을 더 두려워할까 싶어 다시 정리하여 옷장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다. 이 옷이 최대한 늦게, 꺼내지길 바라면서...
그리고 엄마의 마지막 숨이 천국에서의 첫 숨이 되길 바라면서 살아오면서 힘든 것 모두 한꺼번에 보상 받기라도 한 듯 하늘한 선녀같은 옷을 입고 날아가길 바라는 마음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