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a엄마의 보호자
2023년 9월 23일,
가을을 알리는 추분(秋分) 날, 눈이 부실정도로 그날은 아침햇살이 강했다.
엄마의 숨소리가 옅어지고, 엄마가 살아있다는 모든 신호가 삐-음과 함께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20시간에 가까운 엄마의 거친 숨소리는 조용해졌고 산소를 주입하던 기계음과 산소포화도를 재던 기계음이 모두 꺼지며 임종실 내는 적막이 가득했다.
엄마와 나, 단둘이
삶과 죽음이 함께 공존하는 순간이었다.
지난 1년 6개월 간의 투병생활을 마무리하며 비로소 편안해진 죽은 엄마의 모습은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실감 나지 않았다. 귀가 제일 늦게 닫힌다 하여, 천국으로 가는 엄마를 계속 부르며 붙잡았다.
혹시나 숨을 쉬지 않는 게 무서울까, 혹시나 내 목소리를 더 듣고 싶을까, 혹시나 날 더 보고 싶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임종을 지키며 수십만 번 불렀던 엄마를 계속 불러댔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싸늘하게 식어만 갈 것 같던 엄마의 몸은 한동안 따뜻했다. 온기가 점차 사라지는 것이 아쉬워 이불을 덮어 엄마의 손과 발을 주물렀다.
림프절이 부어 코끼리다리만 했던 엄마의 다리는 심장운동이 멈추면서 바람 빠진 풍선처럼 쭈글쭈글했다.
엄마의 눈, 코, 입, 입술, 손, 손톱, 다리, 발, 발톱 모두 눈에 담았다.
오전 8시 25분
주치의의 사망선고가 공식적으로 내려졌고, 엄마 이름 앞에는 공식적으로 '故'가 붙은 고인이 되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생시에, 엄마는 그렇게 갔다.
엄마가 떠나기 3일 전
서울에 있는 회사에 급히 가야 할 일이 생겼다. 호스피스에 엄마를 두고 먼 길을 가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가야 했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빨리 일을 마무리하고 와야 지하는 생각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급하게 일을 보고 다시 내려가는 대구행 기차 안에서 불안감이 엄습했다. 엄마와 내가 마치 도킹되어 있듯이 엄마의 상태가 좋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날 따라 시속 200킬로로 내달리는 고속철이 느리게만 느껴졌다. 대구에 가까워질수록 빗방울이 거세졌다.어둠이 짙게 내린 기차 창문에 비추는 내 모습이 한없이 어두웠고, 본능적으로 지금 이 순간 엄마가 생사를 다투고 있음을 느꼈다.
엄마가 없는 빈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슬펐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고, 빈 집임이 분명한데 엄마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아 발걸음을 재촉했다. 신발이 젖을 정도로 비가 세차게 쏟아졌다.
불이 꺼진 집으로 들어가서 '엄마!'라고 크게 외쳤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허무하고, 슬프고, 빈집이 크고 무섭게 느껴졌다. 어디선가 엄마가 나를 애타게 찾고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밤이 지나갔고, 동이 틀 무렵에 호스피스 병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보호자님, 어머니 시간이 다 되어 가는 것 같아요....'
대학병원은 코로나검사를 해야 병실 면회가 가능했다. 호스피스 보호자도 예외는 없었다.
비가 오는 날임에도 보건소로 향해 검사를 마쳤고, 뭔가 불안함에 모든 일을 당겨서 무리하게 했다.
그럼에도 엄마가 걱정할까 봐 밥도 든든히 챙겨 먹고 다음 날 코로나 검사여부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밤 11시...
자정...
새벽 2시...
밤을 꼬박 새워서 회사업무를 모두 해결했다.
마치 게임의 퀘스트를 깬 것 마냥 마음이 후련했고, 이제 해가 뜨면 엄마를 만나러 갈 수 있음에 들떴다.
창문을 열어 새벽공기를 깊게 들이켰다. 새 집은 야경이 정말 멋진 곳이었다. 처음 이사 온 날, 키가 작은 엄마랑 엄마보다 키가 조금 더 큰 내가, 창문에 붙어서 '우와~' 거리면서 좋아했던 순간이 생각나서 피식-하고 웃었다. 엄마는 탁 트인 전망을 참 좋아했다.
'예수님 부처님 세상 모든 신이시여, 제 목소리가 들리나요, 들린다면 제 기도를 조금 들어주세요,
늘 선하고 착했던 엄마에게 이런 고통을 주는 것에 저는 화가 납니다. 왜 하필 우리 엄마여야 했는지 어디 가서 따지고 싶은데 하지만 이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죠.
엄마가 그동안 쌓아온 모든 선(善)들을 다 쏟아부어 더 이상 아프지 않고, 편안하게 삶을 마무리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마음 약한 신이 제 목소리를 듣고 있다면 꼭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간절한 기도를 올리고, 얼마 안 있으면 동이 틀 정도로 아주 깊은 새벽이었다. 잠을 자야겠다 싶어 새벽 3시가 훌쩍 넘어 잠깐 잠에 들었다.
새벽 6시 20분 무렵,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에 잠에서 깼다. 평소 같으면 조금 늦장 부려서 병원을 갔을 텐데 뭔지 모를 싸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잠시 머리가 정지된 듯 무엇부터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아 소파에 앉아서 멍하니 시계를 쳐다보았다.
창 밖으로는 출근길을 재촉하며 차들이 막혔고, 걸어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속절없이 지나가는 시계 초침이 애석했다. 온몸이 찌릿찌릿한 전기가 통하는 것 같았고, 뭐부터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본능적으로 '오늘이 엄마의 마지막 날' 인걸 느꼈다.
마치 여행길에 오르듯 큰 캐리어를 꺼내서 보호자 물품을 챙기고, 수의와 내 검은 정장을 깨끗하게 털어서 가방에 넣었다.
오전 8시 무렵이면 날라 오던 코로나검사 여부가 9시가 넘었는데도 날아오지 않았다.
일단 병원에 가서 기다려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택시를 탔고, 택시기사에게 목적지 이름을 말하니 룸미러로 나를 쳐다보았다. 호스피스 병원으로 가는 택시 안이 참 평화로웠다.
병원에 도착하고 나서도 코로나검사여부가 문자로 날아오지 않아 애가 탔다. 보건소에 전화하니 담당자가 내 전화번호를 잘못 기입하여 문자가 발송되지 않았다고 한다. 애가 탔지만, 모든 것이 순리대로 될 것이라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오전 10시,
드디어 코로나 음성 문자가 날아왔고, 나는 드디어 엄마를 만날 수 있었다. 엄마를 만나기 전, 호스피스 간호사가 나를 불러 세웠다.
'엄마가 상태가 안 좋아요, 산소호흡기를 최대로 올렸지만 오래가진 못할 것 같아요, 임종을 보실 수 있도록 다른 가족들에게 알리세요'
알겠다고 했지만, 알릴 가족이 없었다. 쓸쓸한 마음을 뒤로하고 엄마가 있는 병실로 갔다.
황달수치가 높았기 때문에 엄마는 노란 인간이 되어있었다. 체인스톡호흡을 하고 있는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흐릿하게 눈을 떴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더 이상 엄마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섬망이 심했기 때문에 엄마는 산소호흡기를 떼려고 했다. 그런 엄마를 제지하면서 엄마에게 마지막 말을 쏟아냈다.
35번째 계절을 함께 보내면서 서운했던 것, 힘들었던 것, 좋아했던 것, 즐거웠던 것, 행복했던 것...
엄마와 지낸 지 35년인데 몇 시간 만에 그 이야기를 다 끄집어내는 것이 한계가 있었다. 이제 그냥 엄마가 편안해지기만을 기도했다.
'한두 시간, 길면 12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은 것 같아요, 조금 있다가 임종실로 옮길게요'
호스피스 간호사가 담담하게 나에게 말했다.
그 무렵, 아무렇지 않았던 엄마 옆 침대의 환자가 운명했나 보다, 커튼이 쳐지고 일사천리로 침대가 빠져나갔다. 그 환자는 자식이 4명이었는데 교대시간에 그리되었다.
자식이 많아도 임종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에 지금 내가 엄마의 마지막을 지킬 수 있음에 감사함이 몰려왔다.
'엄마가 이렇게 버텨준 덕분에 내가 회사일도, 엄마의 임종도 지킬 수 있게 되었구나'
오늘 하루 어떻게 될진 몰라도 엄마옆에 꼭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지킬 수 있음에 감사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밤새 잠을 설쳤던 터라 엄마옆에 엎드려 누워서 잠깐 잠이 들었다. 임종실로 옮기자는 간호사의 말에 내가 대답을 미쳐하기도 전에 엄마침대가 옮겨지고 있었다.
급하게 짐을 챙겨 '가족실'이라 적혀있는 임종실로 갔다.
그동안 병실 내에 다른 사람들과 부대껴가며 시끄럽게 있었는데 한 순간 엄마와 나 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산소호흡기의 기계음이 시끄러웠지만, 그 마저도 감사한 순간이었다. 이제 넓은 방에 엄마와 조금 더 가까이 붙어있을 수 있었다.
호스피스실에서 영정사진을 준비해 준다고 하여 미리 준비한 파일을 건네주었다.
엄마의 영정사진은 정말이지 너무 우아하고 멋있었다.
숨만 붙어있는 시체에 가까운 모습의 엄마와 대비되었다.
'맞아... 엄마는 원래 이런 모습이었지'
이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엄마의 원래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려왔다.
그럼에도 엄마의 임종준비는 차분히 진행되었고, 장례 준비도 마쳤다. 도와줄 가족이나, 임종을 함께 해 줄 가족도 없었지만 혼자서 차분하게 모두 준비했다.
엄마에게 고했다.
'엄마, 이제 다 준비됐어, 나 혼자 엄마를 보낼 준비를 다했어, 그러니 엄마도 너무 걱정 마'
시간이 갈수록 엄마의 숨은 더 가쁘고 힘들고 느려졌다.
어렵게 내뱉은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아마 그게 엄마가 말한 마지막 말이었을 것 같다
'엄마는 걱정하지 마... 미야'
서로가 서로를 걱정하지 말라며 엄마와 딸은 그렇게 영원한 헤어짐을 맞이하고 있었다.
1-2시간이라던 엄마의 임종은 훨씬 뛰어넘었고, 12시간을 향해갔다.
엄마가 혼자 남을 내가 걱정되어 억지로 힘들게 버티고 있는 것 같아 너무 애가 탔지만 엄마가 버티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밤이 되자 엄마의 숨소리는 여전히 거칠었지만 모든 생체신호가 정상에 가까웠다.
혈압이 낮을 뿐, 산소포화도, 맥박 모두 정상범위였다.
신기할 정도로 엄마가 편안한 수치를 보여주어서 안타깝고, 미안하고, 감사했다.
밤 12시...
시계가 9월 23일을 알렸고, 엄마는 그렇게 하루를 버텼다. 이제 그만 가도 된다고 말했음에도 엄마는 버텨주었다. 무언가가 할 말이 있는 듯, 무언가를 하고 싶은 게 있는 듯했다.
엄마가 호스피스에 들어가기 전, 잠깐 엄마와 함께 마지막을 상상해 본 적이 있다.
엄마 장례식, 엄마 제사상에 올릴 음식, 엄마랑 헤어질 때 어떤 말을 할지..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말이다.
엄마는 처음에 무빈소장례를 원했으나, 투병생활동안 감사한 분들이 많아 꼭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혼자서 장례를 치르는 것 때문에 쓸쓸해할까 간소하게나마 하기를 원했다.
엄마는 평소에 채식주의자였다. 고기보다는 생선, 생선보다는 채식을 좋아했다. 그래서 본인 제사상에 올릴 음식을 꼭꼭 집어서 알려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헤어질 때 하이파이브를 하자고 약속했다. 슬프게 울지도 말고, 다음 세상으로 가는 것을 응원해 주자는 의미였다.
그 시간에 나눈 대화들이 참으로 우습기도 하고, 행복했다.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엄마는 호스피스 병동으로 입원했고,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다.
섬망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엄마는 평소와 다르게 모르핀의 부작용으로 아주 난폭해지고, 했던 말을 또 하고, 마약진통제의 괴로움을 그렇게 표현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고, 감히 내가 엄마의 고통을 상상조차 할 수 없어서 너무 힘든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엄마랑 헤어짐에 대화조차 나눌 수 없음에 슬펐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꼭 , 엄마가 나와 눈을 마주치고 행복하게 떠날 수 있도록 기도했다.
엄마의 임종 5시간 전,
새벽 3시 무렵, 나는 잠깐 잠에 빠졌다.
엄마의 가쁜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엄마 어깨에 기대어 손은 엄마 심장에 두고 잠을 잤다.
얼마나 잔 지 모르겠다. 불편한 자세임에도 아주 달콤하게 잠을 잤다.
행여나 엄마의 임종을 놓칠까 싶어 따뜻한 엄마의 손도 잠결에 계속 만졌다.
따뜻하다 못해 뜨뜻한 엄마의 손이 너무 좋았다. 아주 오랜만에 엄마옆에서 잠이 들었다.
엄마도 편안했는지 모든 수치가 안정적이었다
새벽 5시쯤
멀리서 동이 트는 것이 창문 밖으로 느껴졌다.
간병인 분이 들어오셔서 밤새 엄마가 편안했음에 감사의 기도를 올리며 기저귀를 갈아주셨다.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었다.
엄마가 평생 선(善)을 쌓았는데, 그 마일리지를 모두 털어버리듯, 투병생활동안 모두모두 감사하고 힘이 되는 분들이 많았다.
아침 6시,
엄마의 숨이 이전과는 다르게 낮아지고 길어졌다.
안정적이었던 수치도 조금씩 변동 폭이 생기고, 직감적으로 '엄마가 이제 가려고 하는구나...' 했다.
'엄마, 이제 가려고 나한테 신호 보내는 거야? 엄마 짐 잘 싸고, 빠진 거 없이, 엄마 원래 잘 챙기니까 걱정 안 할게'
'엄마, 지금 우리 잠깐 헤어지는 거지? 엄마 나 얼굴 까먹으면 안 돼, 건강하게 잘 살다가 100살에 엄마 만나러 갈게'
'그때 꼭 마중 나와야 해! 나 길치자나~ 겁도 많고! 엄마가 꼭 마중 나와야 해'
'그리고 살다가 내가 엄마 보고 싶어서 "엄마!!" 하고 부르면 꼭- 내 옆에 와줘 알았지?'
희미하게 엄마의 고개가 끄덕였다. 내 말을 듣고 있었다. 동이 트면서 해가 떴고, 아침이 되었다는 내 말에 엄마는 화답하듯 엄마의 생체신호는 점점 낮아졌고, 숨은 계속 길고 낮아졌다.
마침내 막힌 숨을 턱-하고 내뱉듯, 엄마는 긴- 호흡을 마지막으로 천국에서의 첫 숨을 내쉬었다.
엄마의 마지막 숨인 줄 알았지만, 그 후로 엄마는 나에게 화답하듯 손을 들어 하이파이브하는 시늉을 했다.
의료진들은 그게 사후 경직되는 순간이라고 하였지만, 엄마랑 나만 아는 시그널이었다.
파도가 온몸을 휘감는 듯 힘을 쓸 수 없었고, 너무 슬펐지만, 행복했다.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 엄마는 희한하게도 편안해 보였다. 찡그림도 없고, 청색증이라 하는 검푸른 피부도 아니었고, 오히려 혈색이 돌았다.
임종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간호사들이 찾아와 시끄러운 기계를 모두 껐다. 고요한 정적만 남았고, 엄마가 천국으로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귀신 단어만 봐도 기겁했던 나는,
죽은 시체 앞에서 얼굴을 비비대면서 엄마의 마지막 체온과 살결을 느꼈다. 산소호흡기 때문에 가까이 갈 수 없었는데 하나도 무섭지 않고, 너무너무 행복했다.
양력 5월 29일 오전 8시 25분
양력 9월 23일 오전 8시 25분
엄마랑 이 세상에서 처음 만난 시간과 엄마랑 이 세상에서 헤어지는 시간이 신기하게도 일치했다.
마치 신이 무언가 마지막 퍼즐을 맞춘 듯했다.
병원에서 말했던 임종의 시간을 훌쩍 넘어 엄마는 거의 24시간을 버텨주었다. 무언가 하고 싶었던 게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의 답은 바로 '나'였다.
엄마는 마지막으로 나와 함께 하룻밤을 보내고 싶었건 것이었던 것 같다.
항상 바쁘다는 핑계로 밤늦게 자거나 병원에서도 엄마 혼자 놔두고 집에 와서 잤다.
엄마는 마지막에 나와 함께 밤을 보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서로가 어깨에 기대서 체온을 나누면서 그렇게 마지막을 보내고 싶었던 엄마의 마음이 그 긴 시간을 버틸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고인이 된 엄마에게 예를 충분히 갖춰, 장례식장으로 옮겨졌다. 장례식장으로 옮기는 차 안에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참으로 눈부시고, 맑은 가을하늘이었다.
엄마의 소원대로 찬바람이 부는 날, 그렇게 엄마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