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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전문가 Apr 23. 2019

집에서 노냐고 좀 묻지 마세요

어제는 아이의 잠투정이 상당히 상당한 날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이집 친구와 킥보드로 학교 운동장을 수없이 돌며 스피드 대전을 펼쳤으니 우리 저질체력 상전님께서는 저녁까지 보전할 체력이 없었던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억지로 대성통곡하며 사이사이 하품까지 끼워 넣던 기함할 잠투정의 딸을 겨우 재웠다. 심신이 지친 날의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남편과 나는 맥주에 소주를 말아 마주 앉았다. 아이 이야기, 남편의 직장 이야기, 제주 생활 등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는 오랜만의 시간이 정다웠다. 


그러다 나는 갑자기 울어버렸다. 

갑작스러운 눈물이 민망해 웃는 눈과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으려 미어지는 입. 기괴한 하회탈의 얼굴을 하곤 말했다. "집에서 노냐고 했다니까"


얼마 전 알게 된 분이 내게 집에서 논다고 몇 번이고 말했고, 다른 사람에게도 집에서 논다는 식으로 내 이야기를 했다. 그냥 그분은 '전업주부'라는 말을 그렇게 하는 것이었다. 연세도 있으셨고 안 지 얼마 안된 사이라 듣긴 싫었지만 대충 넘겼다. '뭔 저런 말을 생각 없이 잘도 하시네' 하며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은 그렇지 않았었나 보다. 


분노의 설거지를 하며 개털같은 막말을 곱씹는다. (출처:코미디닷컴)


아이를 낳아 키운 지 4년이 되어 간다. 아이를 갖기 전까지 몇 년 동안 다녔던 직장은 칼퇴에 특근이 거의 없어 육아하며 다니기 좋은 조건이었지만, 급할 때 도와줄 수 있는 가족이 없었고 그렇다고 남의 손에 맡기기는 심적으로 더 어려울 것 같아 퇴사를 택했다. 만 4년을 내 이름 석자가 아닌, '누구 엄마'라는 이름으로 더 많은 시간 지내왔다. 아이 낳고 3년 간은 손이 많이가 힘들었지만 이제 어린이집을 다니니 오전과 낮 시간에 좀 숨통이 트였다. 돈을 벌고 싶기도, 백세 인생이라는데 길게 의미 있을 일을 찾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경력 단절과 육아 외의 시간이라는 조건을 달고는 쉽지가 않다. 


"육아를 몇 년 하다 보면 있잖아, 가끔 내가 텅 빈 것 같이 느껴져." 

실체 없는 감정을 털어놓다 보니 더 벅차오르게 눈물이 났다. 

나의 효용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하는 낮아진 마음. 사회 변두리에 투명인간처럼 사는 기분. 나의 능력과 사회적 쓸모에 대한 의문. 엄마라는 이름 말고 내가 가질 수 있는 그 어떤 의미에 대한 고민. 


너는 정말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거라고 늘 말해주는 남편에게는 물론 고맙다. 사회에서도 엄마에 대한 가치를 귀하고 대단하게 추켜올려주지만 저런 고민들은 피할 수 없는 물웅덩이처럼 여기저기에서 불쑥 나를 적시고 만다. 




작년 여름,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 있는 시간 동안만 근무하는 조건의 일자리를 3개월가량 다닌 적이 있다. 대표는 아이를 키우는 아줌마 사원을 고용하는 것에 대하여 굉장히 본인이 편의를 봐주고 있으며 내가 너를 '써준다'는 식의 포지션을 취해왔다. 나에게는 '감지덕지' 포지션을 은근히 강요하며. 

어차피 다니던 중 제주로 이사 가게 되어 퇴사하는 막판엔 경멸의 눈빛을 쏴주었지만 그것으로 시원치 않았다. 가끔 구인광고를 들여다보면 기혼 육아자는 일자리에 대해 아주 간절하고 아쉬운 마음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의 느낌을 받는다. '당신 집안일은 집안일이고... ' 쓰여있지 않아도 음성지원이 되는 것은 왜인지...


일하는 엄마의 아이는 언제든지 아플 수 있고, 아이를 돌보는 엄마도 사회인으로서 인정받고 돈도 벌고 싶다. 온전히 아이를 돌보지 못한다는 죄책감과 사회의 한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한다는 소외감. "이렇게 늦게 들어가면 애는 누가 봐?" 또는 "집에서 놀아?" 따위의 막말 웅덩이를 밟을 수밖에 없는 비참함은 어떤 엄마도 피할 수가 없다. 애 보는 거야 그 집 사정이고, 집이 놀이공원이야 놀긴 뭘 노냐고. 


얼마 전 영화 토론 프로그램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엄마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이의 성과'가 되는 사회 분위기가 엄마들을 성과에 미친 괴물로 만든다고... 

개털 같은 막말에서 이제 그만 허우적거려야 하는데 쉽지 않다. 이 시대 엄마들의 자존감은 엄마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종종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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