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에노스아이레스에 왔다가 하루 만에 우루과이 몬테비데오로 넘어온 지 4일째. 이곳의 어떤 면이 마음에 들어서 계속 있을까. 직장인 특성상 길게 휴가를 못 내서 쫓기듯 여행하게 되기 쉽고 뭔가 일정상의 빈틈이 보이면 마음이 초조해질 수 있다. 왠지 아까운 휴가를 낭비하는 것 같은. 이번 여행이 일반적인 직장인과는 많이 다른 한 달이 넘는 기간이지만 여기 몬테비데오에서의 체류가 길어지다 보니 내가 이 소중한 휴가를 너무 느리게 느긋하게 쉬면서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볼 것 경험할 것 짧고 굵게 해치우고 어서 다른 곳으로 가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마음이 살짝살짝 고개를 내민다. 이런 생각이 든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 참 '열심히' 여행 다녔고 몸이 아팠던 경우를 제외하면 쉰 적이 없었다.
더하고 더해나가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빼기를 생각하게 된다. 살림살이 세간, 땅고, 그리고 글쓰기도. 장황하게 온갖 자잘한 경험을 전부 기록하기보다는 핵심을 깊이 있게 적으면서 생각의 심연으로 들어가 보고 싶어진다. 일단은 자주 많이 써보는 것이 시작이겠지 처음부터 빼기는 어렵다. 브런치에 이 첫 글을 올리기 전에 이미 네이버 블로그에 서른 편이 넘는 장문의 여행기를 적어보면서 글을 다듬고 정제할 필요를 느끼게 된 것 같다.
지금 내 머리에 떠오르는 여행이란 세상을 관찰하며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궁극에는 내 안의, 내가 몰랐던 '나'를 여행하는 것 같다. "나에게 이런 면이 있었네 이런 생각도 하는구나"를 알게되는.
겉보기로는 마냥 한가로이 하는 일 없이 시간만 흘려보내는 것 같지만 속에서는 나에 대한 여행이 진지하게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여행이 전부가 아니라 눈에 안 보이는 나의 내면으로의 여행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져 왔음을 오늘에서야 비로소 조금 인지가 된다.그러니 초조해하지 말자.
세계의 지역들이 각기 다른 면이 있지만 우루과이 몬테비데오도 독특한 면이 있음을 알게 된다. 내가 여행을 다니면서 가장 관심을 두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이다. 사회를 이끄는 에너지, 문화 예술을 주도하는 에너지, 지역민들의 사고방식인 멘탈리티에 영향을 주는 정체불명의 그 무엇.
걸어 다니면서 이곳저곳에 시선을 주고 관심을 가져본다. 가까이 다가가서 또 들어가서 까베세오를 하고 대화를 시도한다. 낯섦의 어색함을 주저하지 않고 용기를 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질문하기,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기, 가면을 쓰는 것은 나를 억압하는 것이다. 가면을 벗어던지면 무한한 가능성과 자유로움이 나에게 주어진다. 새로운 관계 맺음을 통해 나의 경계가 넓어진다.
몬테비데오의 구시가지를 걸어 다니다가 어떤 책방이 근사해 보여서 들어가 보았다.
이렇게 우아한 서점은 처음이다. 내부의 향기도 좋고. 80년 역사를 가진 곳이고 서점의 역사에 대한 책도 있었다. 나이가 지긋하고 점잖은 70대의 남자분이 안쪽 사무실에서 나와서 반갑게 맞이해 주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루과이인들의 멘탈리티에 대한 아래 책 이야기를 시작으로 우루과이인들에 대해 알려준다.영문 번역판은 아직 없고 스페인어판을 번역기를 사용해서라도 읽어보고 싶다. 작년 초에 세르비아를 갔을 때 에어비앤비 집에 있던 세르비아인에 대한 책을 보면서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듯이 이 책도 읽어보고 싶다.
이 작은 도시에 서점도 박물관도 Theater도 아주 많다고 하고 나도 정말 그렇더라고 수긍했다. 문화와 예술을 좋아하는 이들이라고. 나라의 인구는 350만이고 이 정도가 적당하다면서 자기들 나라가 외부에 알려지기보다는 자기들만 알고 싶다면서 웃는다. 국민성이자긍심과 자존감이 높아 보인다.
업무와 여행의 편리함을 위해 고민하다가 결국 폰을 새로 샀다. 듀얼 Sim이 되는 샤오미 폰으로. 사진 찍을 때 무음도 된다. 삼성폰은 이미 갖고 있으니 한 번도 안 써본 샤오미로. 우루과이 Sim으로 전화와 데이터를 쓰면서 한국에서 걸려오는 전화와 문자도 다 받을 수 있게 되니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책방 주인에게 파손된 폰에 들어있던 사진을 보여주려다가 못 보여주고 새 폰을 보더니 수리하질 그랬냐고 하면서 자기들은 뭔가가 고장이 나면 고쳐쓰기를 다들 잘한다고 한다. 이미 6년을 썼고 상태도 많이 안 좋았던 상태라 더 고치기보다는 새로 장만하는 게 낫다고 답했다. 우루과이에서 사는 게 좀 더 비싸긴 하겠지만.
서점의 긴 나무 의자에 앉아서 우루과이와 우루과이의 세계적인 해안 휴양도시인 Punta del Este 안내책을 한 시간 넘게 읽다가 6시 문 닫을 무렵에 나왔다. 책갈피도 여러 개 받았다.
구시가지로 올 때에는 버스 타고 와사 잘 안 보였는데 숙소로 돌아갈 때에는 걸어가면서 Julio 거리를 찬찬히 볼 수 있었다. 속도가 느려질수록 더 자세히 깊이 보인다.
Teatro Solis에서 공연도 봐야지. 이틀 후에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거슈인과 번슈타인 연주가 있다. 한국에서 보기 힘든 레퍼토리여서 더 보고 싶은 공연이다. 다음날에는 포르투갈의 전통적인 FADO 공연인데 포르투에서 못 봤기에 여기서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땅고 박물관. 가르델이 우루과이 출신이라고 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Sube카드로만 타는데 여기는 현금도 가능하다. 불가리아는 신용카드만으로도 탑승이 가능했다. 나라마다 다 다르다.
자스민한 묶음에 3300원. 깊고 달콤한 향기가 있다.
꽃이란.. 가심비라는 표현을 쓴다. 가격 대비 심리 비. 어렸을 때는 꽃을 사고 선물하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길어야 일주일 정도면 시드는 꽃을 왜 비싼 돈을 지불하고 살까 하는.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비싼 밥을 사는 것보다 마음이 담긴 꽃을 선물하는 것이 훨씬 가치가 있고 진한 기쁨과 행복을 준다. 받는 상대에게뿐만 아니라 주는 나에게도 여운이 오래오래 남는다.
이런 노상 꽃가게도 있고
여기도 'FIT'이름을 붙이는 게 팬시 한가 보다.
가보고 싶은 박물관도 많고 Seafood 레스토랑이 있는 Punta Carretas 지역도 가보고 싶다. 서점을 나오다가 같은 호스텔에 묵는 은퇴한 영국인을 만났는데 자기는 몬테비데오보다는 부에노스아이레스가 훨씬 좋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두 도시 중 어디가 더 좋냐고 물어봤고 둘 다 각각 다르게 좋은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호스텔로 돌아오다가 8분 거리에 있는 밀롱가를 찾아갔다. 전화를 몇 번 해봤는데 안 받아서 하는지 안 하는지 직접 확인하러 가봤다.
공간은 아주 근사했고 숙소에 가서 샤워와 여행 와서 계속 기른 수염도 싹 면도하고 옷도 위아래 다 갖춰 입고 21:30 밀롱가 시작 시간에 맞춰 들어갔다.
모든 방향으로 까베세오가 용이한 자리에 앉아서 초반 분위기를 살펴보았다. 시작부터 약 30명 정도가 있었는데 연령대가 많이 높고 춤들이 다들 형편없었다. 부에노스에서 배와 버스로 고작 몇 시간 거리밖에 안 되는데 왜 이리들 기본이 안되어있을까.. 디징은 괜찮았다. 감성도 반응하고 있고. 그런데 출 사람이 없잖아.. 단 한 명도 안 보여.. 슈즈 다시 갈아 신고 나가야 하나? 한 딴다도 안 추고?
중간중간에 새로운 이들이 입장하지만 별 차이 없어 보인다. 젊고 서기가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여자가 있길래 잠시 주시해 봤는데 생긴 것만 괜찮을 뿐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걸 보고 시선을 거두었다. 인물이 괜찮으면 뭐 해 춤을 전혀 못 추잖아.. 지금이라도 나갈까.. 아니야 그래도 좀 더 기다려보자.
내가 가만히 앉아만 있으니 어떤 분이 나에게로 걸어와서 뭐라 뭐라 말을 건다. 당연히 추자는 뜻이겠지. 이런 무례한 손까베에는 나도 머뭇거림 없이 No! I don't want to dance with you.라고 직설화법으로 냉정하게 응수해 주고 돌려보냈다. 시간이 흐르다가 또 어떤 여자분이 다가와서 춤추자고 한다. 미모로는 이 날의 넘버 2여서 그전에 관심 가지고 지켜봤는데 이 분도 되는 게 아무것도 없음을 보고 바로 관심 껐었다. 이 분에게는 그래도 미소를 띠며 부드럽게 거절했다. 넘버 2까지 가차 없이 까이는 걸 다들 지켜보았는지 더 이상 나에게 접근하는 라는 없었다.
마침내 이날 중 가장 젊고 몸매와 자세 좋은 라가 등장했다. 다른 이와 추는 걸 보니 잘 추는 건 아니지만 내가 힘들어할 정도는 아니었다. ㅇㅋ 타깃 설정 완료. 이때부터 내 시선은 그 여자에게로만 향했다. 론다를 돌다가 내 주위로 오면 나를 보란 듯이 눈을 맞추기도 하고. 그런데 꼬르띠나 때 내 자리와 비교적 먼 구석자리에 있었고 어떤 특정인하고만 추는 것처럼 보였다. 까베도 안되고. 재차 삼차 파트너십을 확인한 후에 결국 한 딴다도 안 추고 나왔다. 나도 이제 가면 갈수록 양보다는 질을 추구하게 되는 것 같다.
이런 분위기를 왜 미리 예측하지 못했을까. 아직 다양한 밀롱가 경험치가 덜 축적되어서 그런 것 같다. 오거와 대표강사만 유심히 봐도 그들이 어떤 집단을 끌어올지 대충은 짐작이 가능했을 텐데. 이런 경험도 한 번쯤은 해보는 것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두 번은 불필요하다. 상파울루 밀롱가는 그래도 여기만큼 최악은 아니었지. 땅고를 제대로 즐기려면 역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