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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반 컵 22화

상실의 아픔에 관하여 1

by anego emi

하고 싶은 말은 늘 한 박자 늦게 떠오르는 것처럼, 갑작스러운 상실의 아픔도 그렇습니다. 누군가를 잃은 그날 보다 슬픔은 무뎌지고 내가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면서 행복한 마음이 차 오를 때, 가슴을 찌르며 떠오릅니다. 언니의 죽음은 나에게는 그랬습니다. 아마도 아주 오랫동안 나는 언니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이렇게 감각하게 될 것이지요.


그날은 막내 동생의 생일이었습니다. 저녁 9시가 조금 넘은 시간, 집으로 들어와 곁옷을 벗고 세수를 하려는 참이었죠. 그때 막내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막내 동생은 가끔씩 자신의 생일날이면 선물을 내놓으라고 때를 쓰는 전화를 하곤 했기에 기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습니다. ‘여보세요’…라는 제 말에 아무런 답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몇 번 코를 훌쩍이고 가볍게 한숨을 쉬었죠. “ 누나, 큰 누나가 떠난 거 같아.” 그리고 말끝을 흐렸습니다. 저는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되물었죠. “ 언니가 어디를 가? ” 그러자 동생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 큰 누나가 집에서 돌아가신 거 같아. 형이 지금 수습 중인데 일단 누나는 내일 집으로 와. 엄마가 쓰러져서 병원에 계셔. 아직 큰 누나가 죽은 건 몰라. 누나도 절대 말하지 마. 아직은… 엄마까지 큰 일 나면 어떻게 해. 나는 지금 집으로 가는 중이야.”저는 가슴이 꽉 막히는 걸 참으며 침착하게 말했습니다. “ 그래, 알았다. 운전 조심하고. 아직 밤차가 있을 거 같으니까 얼른 준비하고 나도 내려갈게.”저는 언니와 나누던 카톡창을 열었죠. 이틀 전 언니의 생일날 보낸 축하 메시지를 언니는 읽지 않았더군요.

20살 때부터 각자의 터를 잡고 살아가던 우리 4남매는 경상도 출신답게 모두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에 서툴렀습니다. 그러나 언니는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달라졌죠. 애정 표현이 귀찮다 싶을 정도로 과했습니다. 한 번 시작하면 멈출 줄 몰랐답니다. 저는 그런 언니가 부담스러웠고 때로는 귀찮았죠. 제 생일날이면 새벽부터 생일을 축하한다 는 장문의 메시지와 함께 끝없는 이모티콘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이어졌습니다. 케이크 위에 촛불이 반짝이고, 바구니에 담긴 하트가 꽃잎처럼 날리고, 볼 빨간 토끼가 팡파르를 불고, 귀여운 꼬마가 엄치척을 하고, 흐느적흐느적 막대 같은 풍선들이 신나게 춤을 추는 이모티콘들이 카톡창을 가득 매웠죠. 저는 매번 그것을 볼 때마다, 이 모든 것들은 저에게 보낸 것이 아니라 ‘언니 자신에게 보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왔습니다. ‘ 꽃을 주는 마음은 꽃을 받고 싶은 마음이다’라는 유명한 광고 카피처럼 말이죠.


저는 언제나 언니의 생일날이면 짧은 축하의 인사를 톡으로 보냈습니다. 언니가 먼저 전화를 걸어오면 재밌게 보내라는 건조한 인사를 했죠. 저는 언니의 외로움과 나약함을 외면하고 싶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외로움과 나약함이 저에게 전해질 때마다, 저는 꼭꼭 숨기고 인내하는 저의 외로움과 나약함을 들킨 것 같았으니까요. 그저 씩씩하게 자신의 몸 하나 건사하면서 사는 것이 무엇이 그리 힘들까 하는 생각을 하며 독한 소리를 하곤 했죠. 비록 이혼을 하고 혼자이지만 부모님 옆에서 보살핌을 받고 사는 언니의 처지가 저보다 낮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대학을 졸업하고 힘들게 직장 생활을 하고, 가족들에게 힘들다는 소리 한 번을 안 했으니까요. 그저 가족들에게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었습니다. 돈 잘 벌어 부모님에게 맛있는 것도 사주고, 용돈도 듬뿍 주고 싶었고, 제가 사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은 제 힘으로 다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프리랜서인 저의 처지가 늘 조금은 죄송했고 아버지의 병원비도 생활비도 보태지 못하는 우리 4남매의 무심함에서 제 몫이 제일 큰 것 같았으니까요.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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