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동품 대가 ‘박 선생 (진태우의 여행 캐릭터)의 수집 여행 일정은 4박 5일. 여행사는 여정을 촘촘하게 준비했다.
특히나 중요한 코스는 충청남도 어디쯤이라는 한 산골 마을을 방문하는 일이었는데 매니저 송기석이 자기 인맥을 동원해서 마을을 통째로 섭외했다. 마을 주민들은 자기 집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굴러다니던 허섭스레기가 전문가의 눈에 띄어 순식간에 보물로 둔갑하는 횡재의 꿈을 꾸면서 ‘박 선생’을 기다릴 것이며, 마을의 이장은 박 선생의 골동품 매입 행사를 생중계하기 위해 마을회관 방송시설을 점검하고 있을 터였다.
약 열흘 뒤, 진태우는 여행사에서 지정해 준 대로 구식의 갈색 양복에 머리와 수염을 덥수룩이 방치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송기석 매니저가 반갑게 맞이하며 미리 인쇄해 둔 ‘골동품 심사원 박 선생’의 명함을 그에게 전하자 그에 응답이라도 하듯 진태우, 아니 박 선생은 은행에서 갓 찾아온 현금을 쭈뼛쭈뼛 내밀어 보였다. 오만 원짜리다발로 꽉 찬 종이봉투였다. 그 돈 봉투는 진태우를 진정 박 선생으로 둔갑시키는 ‘변신 수트’ 의 잠금장치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박 선생님, 여행을 떠나기 전에 현금을 넣고 다닐, 튼튼하고 값어치 있는 가방을 하나 장만하는 게 어떨까요?”
송기석이 제안하자 진태우는 자기가 들고 있던 프라다 가방이 부끄럽다는 듯 슬그머니 뒤로 감추며 이렇게 물었다.
“가방이라면 어떤....... 아주 비싼 거 말씀이신가요?”
“값이 아니라, 박 선생님은 장인의 철학과 고집이 담긴 가방을 원하시는 거 아닙니까?”
“네? 제가요? 그런 게 어디 있는지.......”
“에이, 그걸 찾아내는 능력은 박 선생님이 갖고 계시겠지요. 제가 보물이 있을 만한 창고로 안내해 드릴게요!”
그제야 송기석의 말을 알아들은 진태우는 웃을 듯 말 듯 입술을 달싹거리며 말했다.
“아아....... 진짜 시작하는 거군요?”
두 남자의 여행은 서울 한복판의 고물시장에서 시작되었다. 안목만 있으면 보물을 건져 온다는 명성은 옛 시대의 전설일 뿐, 과잉생산 시대인 오늘날은 버려진 물건의 산더미일 뿐인, 바로 그 시장이었다. 그 속에서 쓸 만한 물건을 가려내기란 당연히 잡초 밭에서 네잎클로버 찾기보다 힘들었다.
특유의 퀴퀴한 냄새와 온갖 허접한 물건의 사이를 진태우, 아니 박 선생은 하염없이 걸었다. 거대한 물건의 홍수 속에서 자신이 실재로 존재한다는 것이 도무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그의 옆에서 쉬지 않고 소리를 내는 송기석만이 자기 존재의 희미한 단서가 되어 주는 듯해서, 그 소리를 부여잡고 있어야 했다. 마주치는 행인들과 인사를 나누랴, 상인들이 집어주는 떡을 받아먹으랴, 자기 신발 깔창을 골라 구입하랴, 송기석은 분주했다. 그리고 틈틈이 박 선생이 살 만한 물건을 추천하는 일도 빼먹지 않았다.
두어 시간이나 지난 뒤, 박 선생이 생경한 시장 풍경 속에 간신히 자기의 존재에 적응하게 되자, 주변의 물건들도 비로소 눈앞에 실재하기 시작했다. 막막한 얼굴로 걷기만 하던 그는 간혹 고개를 돌리기도 하고 시선을 고정시키기도 했다. 자기가 이 안에서 해야 할 미션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마침내 손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 순간을 고대하고 있던 송기석은 엽렵하게 몸을 움직여 손끝이 가리키는 바로 그 곳, 버려진 물건들 속에 귀퉁이를 내밀고 있던 낡은 가방을 집어 들었다. 평소에 안면이 있던 ‘양씨’ 가게의 물건이었다.
“하! 역시.......”
송은 짧은 감탄사를 날렸다.
“어, 어떤 것 같아요?”
박 선생이 의견을 묻자 송이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좀 낡긴 했는데 정말 고전적인 디자인이에요. 이 잠금장치, 이건 장인이 만든 수제품인데......., 선생님 보시기에 예술적인 가치가 있는 거죠?”
송의 탄복이 사뭇 멋쩍고 어색했지만 싫지만은 않았던 듯, 박 선생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스쳐갔다.
아까부터 두 남자를 바라보던 가게 주인 양씨는 쓰레기나 다름없던 그 가방에 대체 얼마의 값어치를 매겨야 할지 당황하며 바삐 잔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양 사장님, 이 가방, 얼마 드리면 될까요?”
송기석이 묻자 주인은 기회를 놓칠 새라 먼저 숫자를 내놓았다.
“오.......”
그리고 머릿속으로 적당한 단위를 고르다가 이렇게 결정하고 말았다.
“....천 원은 주셔야 겠는데......”
하고는 아차 싶다. ‘만’을 택할 걸 그랬나?
“오천 원이요?”
박 선생이 깜짝 놀라 되묻자 양 씨의 머리에는 ‘어차피 아무도 안 살 물건인데 좀 지나쳤나?’ 하는 후회가 스치고 지나갔다.
송은 박 선생의 결정을 부추기기 위해 넌지시 끼어들었다.
“하! 뭐 양 사장님이야 늘 받을 만큼만 금액을 부르시니까.......”
하지만 박 선생은 뭔가 주저하고 있었다. 한 아름이나 되는 고액 현찰 중에서 그깟 오천 원짜리 한 장 빼 쓸 결단력이 없는 그가 참으로 딱하다 싶을 때쯤, 뜸을 들이던 그가 입을 열어 단호하게 말했다.
“송 비서, 5만원 드려요. 물건의 가치를 아는 사람으로서 그렇게 헐값에 구입을 하면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아! 이건 뭐지? 진태우 이 친구 혹시 어디서 메소드 연기 배운 거 아냐?’ 하는 의혹이 송기석의 머릿속을 잠깐 스치고 지나갔다. 한번 불기운을 주자 진태우의 내면에 억눌려왔던 자존감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기세였던 것이다.
한 아름의 돈다발을 새로 산 가방에 옮겨 담은 뒤, 박 선생과 송 비서는 그 시장에 좀 더 머무르며 돈을 썼고, 발걸음마다 고물상들의 격한 환영을 받았다. 그새 시장 안에 소문이 짜하게 퍼져나갔던 모양이다.
그 정도 적응 훈련을 마쳤으니 이제 그 기세를 몰아 본 게임을 시작할 때였다. 박 선생과 송 비서는 자동차를 세워둔 주차장을 향해 걸어가며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이어갔다.
“박 선생님, 이번 여행지에서 부여의 유물을 하나 기대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뭐, 그렇게 된다면야 좋지만, 굳이 유물이 아니라도 무방합니다. 물건의 가치는 보는 사람 눈에 달린 것 아니겠어요?”
‘틀림없이 연기학원 다녔네, 다녔어.’
두 사람이 이렇게 역할놀이에 빠져들고 있는 동안 몰래 뒤를 따르는 발길이 있다는 것을 그들은 미처 알지 못했다.
고물시장에서 구입한 잡동사니 몇 개를 자동차 뒷자리에 실은 뒤, 송은 날쌔게 반대편 뒷자리의 문을 열고 박 선생을 쳐다봤다. 그러나 박 선생은 뒷자리에 타는 대신 호방한 기세로 가방만을 던져 넣고는 앞자리 조수석에 올라앉으며 말했다.
“같이 앉아서 가시죠. 갈 길이 먼데.......”
그는 자연스러운 데다가 제법 품위까지 풍기고 있었다.
그때 송의 전화벨이 울렸고. 스피커폰을 통해 느릿한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유...... 음식 준비를 하려는데 박 선생님 식성을 잘 몰라서유. 싱싱한 송어회랑 곁들여서 묵은지 쌈 워뜌?” 산골마을 이장이었다.
“아, 난 사실 비린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박 선생이 나지막이 말했건만 상대는 금세 말을 알아듣고 펄쩍 뛰었다.
“큰 실수할 뻔 했슈! 박 선생님 식성도 모르고.......얼른 메뉴를 바꿔 준비헐규.”
만사가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 신비로운 질서의 정연함이라니!
박 선생이 난생처음 맛보는 경험에 아찔함을 느끼는 순간, 자동차의 뒷문이 덜컹 열리더니 돈가방을 들고 튀는 놈이 있었다. 그리고 연달아 송기석이 운전석에서 뛰어내리며 소리쳤다.
“거기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