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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양이 Sep 21. 2024

5. 잘 오셨습니다. (4)



   송기석은 달리기를 잘 했다. 그뿐 아니라 주차장과 시장 곳곳에 그의 지인들이 깔려 있어서 도둑의 도주는 쉽지 않았다. 방향을 틀거나 몸을 숨기면 여지없이

“여기!” 하며 신고하는 눈길들이 있었고, 일부러 몸을 부딪거나 발을 거는 진로방해도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실전으로 훈련된 도둑의 발도 어지간히 빨라서, 잡힐 듯 잡힐 듯 계속되는 추격 끝에 골목길로 내달리던 도둑은 숨이 턱까지 차올라 어느 건물 안으로 숨어들었다.

  엘리베이터를 두고 계단으로 뛰어오르는 도둑을 송기석은 놓치지 않았다. 2층, 3층 6층, 7층.....도둑은 필사적으로 도망가고 송은 또 필사적으로 그 뒤를 쫓았다. 꼭대기는 11층. 도둑이 먼저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송기석도 더 이상 달리기는 힘들었지만, 이대로라면 도둑은 다 잡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옥상 문 앞이냐, 옥상 위냐, 어디에서 항복을 받느냐의 문제만 남아 있는 셈이었다.

  뒤늦게 달려온 박 선생, 아니 진태우도 초조한 얼굴로 건물을 바라보며 섰다. 그 돈으로 말하자면 이 여정에서 진태우를 ‘박 선생’으로 둔갑시켜 주는 변신 수트의 잠금장치가 아니던가!


  11층을 지나 옥상까지 계단을 기어오른 도둑이 마지막 힘을 다해 문을 박차자 옥상으로 나가는 문은 뜻밖에도 쉽게 열렸다. 그러나 추격자의 숨소리는 이미 도둑의 등짝에까지 닿아 있었고, 옥상 난간에서 추격자는 도둑의 뒷덜미를 그러쥐는 데 성공했다. 이제 끝났다!, 고 생각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도둑은 돈 가방을 건너편 건물의 옥상을 향해 힘껏 던졌다. 그리고 그렇게.......정말 끝나 버리고 말았다. 수많은 지폐가 우수수 쏟아지며 바람을 타고 흩날렸다. 11층 건물 아래를 지나던 사람들이 갑자기 하늘에서 내리는 축복에 감격하여 날뛰기 시작했고 도둑과 추격자, 이 둘은 그 장면을 눈뜨고 볼 기운이 없어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지폐들은 진공청소기에 빨려 들어간 먼지들처럼 행인들의 주머니 속으로 사라졌고, 돈의 주인인 진태우의 발 앞에는 텅 빈 가방 하나가 떨어져 있었을 뿐이다. 장인의 손길로 만들었다는 둥, 찬양했던 그 잠금장치가 떨어져 나가고 허술한 실밥만 너불거리는 그 무가치한 가방이.   

 

   

  그날 오후, 두둥실 여행클럽의 매니저 안수호가 유별나게 생긴 소형자동차를 몰고 여행사로 들어왔다. 복잡한 거미줄을 그려 넣는 등 그가 손수 튜닝한 자동차였다. 오전 중에는 그의 39번째 자격증 도전 종목인 ‘폐기물처리기사’ 시험이 있었는데, 시험을 끝내 홀가분한 기분을 느끼기도 전에 40번째 도전 종목을 무엇으로 잡을까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중장비 신호수? 병아리 감별사?...... 작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대문을 들어서려는데 우체통이 그득한 것이 보였다. 여러 장의 고지서와 안내 전단들 사이에 한 장의 엽서가 끼어 있었다.

  숨이 턱 막혔다. 그 흔한 풍경사진 하나 없이 누런 얼룩이 묻어 있는 무지의 엽서, 뒷면에 얼핏, 파란색의 글씨 몇 자가 성글게 휘갈겨 적혀있는 것을 보았건만 그것을 차마 읽지 못한 채 복잡한 감정이 복받쳤다. 반갑고, 그립고, 난처하고, 기본적으로는 슬픔에 가까운 어떤 것이었다.


  사무실에 들어간 안수호가 조용히 아정에게 다가가 엽서를 내밀었다. 보낸 사람에 대해서는 B.J라는 이니셜뿐, 더 이상의 정보가 없는 그 엽서를 받아들자 아정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하필이면 그때였다, 송기석으로부터 다급한 보고가 들어온 것은. 진태우의 여행이 시작된 지 겨우 여섯 시간 만에 사건이 터지고 만 것이었다. 전화기 밖으로 새 나오는 송기석의 목소리만 들어도 이것이 비상사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전하고 순조로운 여정에 대한 책임 조항이 계약서에 버젓이 명시돼 있었다. 고물시장에서 써 재낀 돈이 고작 8만 원 정도, 몇몇 소심한 행인들이 주워 준 돈 120만 원 정도, 그것을 제외한 1000만 원가량의 돈을 척 배상해 낼 만 한 능력이 된다면야 뭐가 문제일까 마는, 여행사의 재정 상태는 매달 은행 이자를 내기에도 빠듯했다.     


  엽서를 받아 쥔 아정이 창백한 얼굴로 골방에 들어간 지 한 시간째, 안에서는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는 중인지, 진태우 여행 건의 대책회의도 진행하지 못한 채 실내의 긴장감은 터질 것 같았고 사람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도 허둥댔다. 곤두선 촉각엔 아무런 소리도, 움직임도 걸려들지 않았다.

  안수호의 머릿속에, 두려움을 무릅쓰고 읽어 본 파란 글씨들이 다시 떠올랐다.     

    

      “아정.......


      너에게 미안하고, 한없이 그립다.

      전할 수 있는 소식이 없어 괴롭다.

      나 대신 우리의 여행클럽이

      너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기를.......


      먼 곳에서 B.J”     


  그것은 B.J에게서 온 두 번째의 엽서였다.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안수호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 자식을 절대, 절대 그냥 놔두지 않으리라고 이를 악물었다. 그 분노를, 한 순간도 비켜서지 않았던 질문이 밀어낸다. 대체 언제? 언제쯤, 있는 힘을 다해 그 자식에게 한 방을 먹이는 그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잠깐의 분노는 성냥불처럼 허무하게 사그라지며 애꿎게 콧물이 흘렀다. 훌쩍!


  두 시간이 지나 골방에서 나온 구아정은 우선 폭신한 빵 서너 개를 연달아 먹어치운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커다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숨죽여 그의 행동을 바라보던 다른 멤버들이 하나 둘, 테이블로 모여 앉았다.     

  “배상을 하긴 해야 되겠지....그런데, 어떻게?”

  안수호가 입을 연 뒤로 여러 이야기가 오갔지만 묘안은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긴 회의가 답을 못 찾은 채 공전하고 있을 때, 의문의 엽서를 받은 뒤 입을 꾹 닫고 있던 구아정이 입을 열었다.

  “진태우한테, 배상금 대신 우리 여행사에 취직하겠냐고 제안해 볼까?”

  구아정의 제안은 엉뚱했지만 토론에 활기를 불러왔다.

  “솔깃해할지도 몰라. 진태우가 원하는 건 다른 게 아냐. 뭔가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거 아니겠어?.”

  “제안을 받아들인다 한들, 진태우를 어디다 써 먹어? 뭐 남다른 게 있어야지!”

  “.......”

  다시 한동안의 침묵. 잠시 후 답을 찾아 낸 것은 또다시 구아정이었다.

  “벌레를 잘 잡잖아!”   

   

  뜻밖에도, 진태우는 넙죽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여행을 통해 가공된 짜릿한 존재감을 맛보는 데는 실패했지만, 어차피 그 여행은 시한부의 이벤트일 뿐이라는 걸 본인도 알고 있었다. 반면 이 여행사는 자기를 필요로 하고 있다. 태어난 지 27년 만에  투명인간의 망토를 벗고 자기의 존재를 남 앞에 드러내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여행사 사무실에서 전화 통화를 할 때, 진태우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어, 엄마....... 내일부터 출근해야 돼요.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내일부터 중요한 일이 있고, 회의도 있어요....... 오늘은 일찍 쉬어야겠어요.”     

 


  다음 날 아침 일찍, 낯선 남자가 자연스럽고도 당당하게 여행사 안으로 들어오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빵을 굽던 구아정이 남자를 바라보았다. 훤칠한 키에 최고급 수트가 제 피부인 듯 편안하고, 반듯한 어깨 위의 귀티 나는 이목구비는 아는 얼굴인 듯, 모르는 얼굴인 듯 ....... 그러다가 구아정은 꺅! 소리를 질렀다. 아! 저렇게 잘생긴 사람이었어? 그는 하루 만에 달라도 너무 달라져 있었다.

  “진태우 씨?”

  “네! 오늘부터 출근하라고 하셨잖아요. 저 무슨 일 할까요?”

  “아, 저.....진태우씨는 벌레를 잡으세.....”

  하지만 진태우는 그 지시를 똑 부러지게 거절했다.

  “어릴 때, 집에서 아무도 저를 신경 쓰지 않다가 손으로 모기나 파리를 잡으면 막 칭찬해 주더라고요. 그래서 벌레 잡는 버릇이 생겼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저 앞으로는 벌레 잡지 않을 거예요. 사실은 그거, 정말 하기 싫다고요.”

  “안 잡아도 돼, 벌레. 그냥 여기 있으면 돼. 그게 당신이 할 일이야.”

  그랬다. 알고 보니 그는 그렇게 멋진 외모를 타고 난 사람이었다. 그냥 거기 있는 것만으로 두둥실 여행클럽 를 빛나게 할 만큼.


  그 이후 여행사 안내서에는 다음의 내용이 추가되었다.


순정만화의 남주   진태우 (인턴 여행매니저)

어디 가나 눈에 확 뜨이는 최강 비주얼의 주인공. 그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자신감이 상승하고 의욕이 충만해집니다. 단지 외모가 멋지다고 순정만화의 주인공일 수 있을까요? 진태우는 오직 당신의 것! 남들에겐 냉정하고 당신에게는 헌신적입니다.


* 아직은 전문성이 좀 떨어집니다. 동의 없이 신체접촉을 시도하시면 벌금이 부과됩니다. 그리고 남자 회원님들에게는 께름칙한 동반자라는 생각이 듭니다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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