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은 꼬박 하루를 이동한 끝에 깊고 깊은 산골에 들어섰다. 빈손으로 떠났던 한시욱은 때마다 필요한 것을 잘도 구해 왔다. 드문드문 만나는 구멍가게가 다 그의 점조직인 듯, 비누를 구하고, 경운기를 얻어 타고, 텐트를 빌려 와 하룻밤 숙박을 해결하기도 했다. 한시욱은 가는 길에 뱀을 두 마리나 잡았고 도사는 그늘에 숨어 있는 버섯을 땄다.
그렇게 산을 오르고 오른 끝에 그들이 도착한 곳은 정말이지 구름이 발아래 깔린 신선의 집이었다. 조 씨의 입에서 ‘헉......’하는 감탄사가 튕겨 나왔다. 그간의 모든 번뇌와 분노와 회의가 벗겨지고 그 빈자리에 ‘맑은 삶’이 찾아듦이 너무도 당연한 곳이었다. 한껏 숨을 들이켜니 머릿속이 맑아지고, 한번 시선을 옮기니 새 삶에 대한 희망이 ‘꿈틀’ 하고 기지개를 켰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조 씨는 앗차! 하며 경계의 스위치를 눌렀다.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가장 안심했을 때 속아 넘어갔으며, 가장 확실했을 때 뒤집어졌고,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에 배신을 당했던 세월이 바로 그의 삶 전체였다.
조 씨는 방에서 부엌으로 뚫린 작은 창의 틈새에 눈을 갖다 대고 몰래 살피기 시작했다. 도사는 기울어진 흙집 부엌에서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한시욱이 이를 도왔다. 불을 때고, 말린 나물을 불리고, 쌀을 정갈하게 씻어 안치고, 버섯을 다듬고, 왜 거기에 있는 건지도 모를 진귀한 식재료들까지 총동원하여 도사는 조 씨를 위한 한 끼를 준비했다.
도사가 정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며 한시욱이 물었다.
“동굴 속에 호수가 있습니까?”
“호숫가의 나무와 풀이 동굴 밖으로 자라 있느니라.”
그러는 동안 방구들은 적당한 온도로 달궈졌고, 창의 틈새로 드리워졌던 의심의 칼날도 슬며시 무디어졌다. 눈꺼풀이 무겁다 했는데 온돌 위에 붙인 등짝의 면적이 점점 넓어졌고, 당연히도 조 씨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얼마나 오래였는지 몰라도, 한숨을 달게 자고 일어난 조 씨 앞에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흰색 린넨 상보 위에 수저는 딱 한 벌. 조 씨만을 위한 밥상이었다. 국과 밥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오르고, 색색의 나물들은 고소한 들기름 냄새 속에 저마다의 향을 머금고 있었다. 그릇들은 투박했지만 정갈했고, 탕기에 담긴 찌개는 온갖 재료를 가지런히 담아 고급스러워 보였다. 잠이 덜 깨어 무방비 상태였던 탓이었던지, 그 밥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울컥, 조 씨의 울음보가 열릴 뻔했다. 그 언제 이렇게 정성스러운 밥상을 받아 본 일이 있던가!
간신히 울음을 참고 한 수저를 뜨는 순간 결국 울음보는 터져 버렸다. 그 언제 이렇게 음식을 먹으며 행복했던 적이 있던가! 조 씨는 눈물, 콧물과 음식을 같이 삼켰다. 눈물, 콧물과 가슴속의 온갖 응어리들, 그리고 음식물들이 한 데 섞여 소화기관 속에서 분해되고 있다고 느꼈다.
밥상 위의 그릇이 반쯤 비어가고 있을 때 한시욱이 숭늉을 가지고 들어와 조씨의 밥상 위에 올려놓았다. 조 씨는 숭늉만 내려놓고 말없이 나가려는 한시욱의 손을 잡아끌어 앉히며 이렇게 말했다.
“매니저 님, 미안합니다. 저는 이 여행이 엉터린 줄 알고, 그저 여행비를 돌려받을 생각만 하고 있었어요.”
“허허....... 만족스러운 여행이 되셨습니까?”
“그럼요.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한시욱은 조 씨가 음식과 가슴속 응어리들을 충분히 소화시킬 수 있도록 얼른 자리를 떴고, 조 씨는 혼자서 오래오래, 한 조각 반찬도 남기지 않고 그릇을 비웠다.
“도사님, 이 은혜를 깊이 새긴 채, 잠시 떠났다 오겠습니다.”
조 씨는 말을 마치고 큰절을 올리려 했다. 도사는 굳이 절을 받지 않으려고 일어서서 만류했다.
“어이구, 은혜라니, 뭐 그런 말을.......자, 이거 받게!”
도사는 품에서 곱게 접은 종이 한 장을 꺼내 조 씨에게 내밀었다.
조 씨는 도사가 베푸는 마음이 과분하여 얼른 그 종이를 받지도 못했다.
“저에게 뭘 또 주십니까?”
“허허....... 잊어서는 안 되는 게 그 속에 들어있네. 접어두었다가 산을 다 내려가거든 읽어보게.”
도사는 엄숙하게 말했다.
하산 길은 조 씨 혼자였다. 한시욱은 산사에서 하루를 더 묵을 예정이라며 조 씨에게 약간의 여비를 쥐어주었다. 정해진 기간이 완료되었기 때문에 여행매니저의 역할은 그로써 종료된 셈이었다. 혼자였지만 조 씨의 마음은 가벼웠고 발걸음은 힘찼다. 가슴에 품은 도사님의 편지로 든든하고 뿌듯했다.
산을 다 내려와 보니 한적한 길가에 칠이 벗겨진 버스 정류소 팻말이 꽂혀 있었다. 버스 번호나 노선, 더구나 ‘몇 분 뒤 도착’ 같은 것을 알리는 서비스는 없었다. 정말로 버스가 이곳에 설 것인지도 미지수였지만 다행히도 먼저 와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학생! 버스가 몇 분에 한 대씩 오는지, 혹시 알고 있나요?”
조 씨의 자신의 온화하고 사려 깊은 말투에 스스로 흠칫 놀라고 말았다.
“버스는 하루에 딱 두 번 오는디, 올 때가 됐어라, 한 10분 지나면 올 것이여.”
아마도 도사는 모든 것을 미리 고려한 것 같았다. 하루 딱 두 번 운행되는 버스가 도착될 시간, 그리고 도사의 편지를 읽어 볼 수 있는 시간 10분! 내용을 곱씹고 여운을 간직하기에 10분은 너무 짧았지만 아마도 하산 길에 조금 지체된 탓이라고 여긴 조 씨는 떠나온 먼 산을 한 번 바라본 뒤 점퍼 안주머니에서 곱게 접은 종이를 꺼냈다. 그의 인생을 새롭게 열어 줄 은밀한 문을 기대하며 손이 바르르 떨렸다.
자연송이 구이 5만 3천 원,
유기농 쌀로 지은 영양밥 4만 5천 원,
송로버섯 기름으로 향을 낸 양념장과 두부 6만 2천 원,
초가을 뱀의 뼈를 고아 끓인 맑은 탕 8만 원
들기름에 볶은 삼색 산나물 3만 3천 원
......
유기농 누룽지에 약수를 부어 가마솥에 끓인 숭늉 3천 500 원
합계 572,500원
계좌번호 백성금고 281-xxxxx
예금주 배철중
바르르 떨리던 조 씨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사기꾼 영감탱이! 어휴, 진짜 이 새끼를! 야! 내려 와! 안 내려 와?”
먼 산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치는 조 씨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중학생 뒤로 녹슨 버스가 나타났다. 중학생은 조 씨를 두고 혼자서 버스에 오르려다가 영 마음이 안 놓였던지 빠른 속도로 일렀다.
“아저씨, 이것이 오늘 막차여. 욕은 뒀다 해도 되지만, 버스는 떠나버리면 끝잉게, 알아서 하쇼 잉.”
삐걱거리며 시골길을 달리는 버스 안에서 조 씨는 또다시 눈물이 났다.
<여행자 인터뷰> 돌아오는 길에 그렇게 가족들이랑 친구들이 보고 싶습디다.
떠날 땐 그 인간들, 정말 다시는 안 보기로 작정을 했었거든요. 아직 떠날 때가 아닌가.......
마누라 보러 가요. 아직 할 얘기가 남아서....... 만나는 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