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는 젊은 여자들이었다. 셔터를 클릭하기도 전에 목격자들의 관심은 자연스레 B의 여행 배경으로 이동했고, 그 순간 그들의 눈에 포착된 것은 B 옆에 우두커니 서 있던 진태우의 모습이었다.
“어머! 옆에 누구니?”
“배우 같은데? 누구더라? 아무튼 배우야. 저 후광 좀 봐!?”
“B랑 같이 왔나 봐. 촬영인가 보다.”
아가씨들은 포커스를 진태우에게 맞춘 채 거침없이 사진을 찍어댔다. 그럴 때 진태우는 참 쓸모 있는 여행 매니저였다.
번쩍이는 초고층 건물의 숲을 지나자, 곧 무너져 내릴 듯 낡은 건물들이 이어지고, 그 건물의 일부를 뚫고 긴 고가도로가 이어졌다. 택시로 고작 30분을 달렸을 뿐인데도 세 사람은 어느덧 전혀 다른 문명사회로 이동한 것만 같았다. 낮은 언덕과 낮은 집들이 호젓하게 모여 있는 홍콩의 변두리에 도착한 뒤, 역시나 안수호가 꼼꼼하게 준비해 준 동선 지도에 따라 세 사람은 미니 레일에 올라탔다.
늦은 밤, 마을과 마을 사이를 이어주는 작은 기차 안에는 오직 두 사람뿐이었다. 아니, 분명 진태우까지 세 사람이었는데도 A와 B는 둘만 있는 듯 편안하고 호젓했다. 둘의 감동이 그만큼 큰 것이었는지, 아니면 진태우가 평생 연마해 온 ‘투명인간 테크닉’ 덕분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한적한 마을에 특급호텔이 있었다. 진태우는 말 한마디 할 필요 없이 안수호가 적어 준 메모지를 꺼내 프런트 데스크에 내밀었고, 프런트의 남자는 또 두말없이 카드키 두 개를 내밀었다. 그 순간, 진태우의 다리에 맥이 탁 풀리며 잠시 휘청했다. 말은 할 수 없었지만 사실 비행기에 오를 때부터 지금까지 초긴장 상태였다.
이제 A와 B, 두 사람을 객실로 들여보내고 나면 진태우는 별 탈 없이 임무를 수행한 것이 되며 의뢰인들로부터 벗어나 쉴 수가 있었다. 혹시라도 진태우가 눈치 없이 굴지 않을까 염려한 안수호는 메모에 이렇게 못 박아 두었다.
“의뢰인들이 입실을 마친 뒤, 매니저는 절대 고객들만의 시간을 방해하지 말 것. 고객들의 예의상 호의 (차나 맥주 등 권유)를 정중하게 사양해야 함.
회사에 전화로 상황 보고 한 뒤 로비에서 새벽 3시까지 그들을 따라온 기자나 팬이 없는지 철저히 살피고 취침.”
그러나 안수호의 지시는 지켜지지 않았다. 웬일인지 A와 B는 좀처럼 객실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진태우에게 함께 바에 가서 술을 마시자고 청했다. A는 예의상의 호의가 아니라 진심으로 이렇게 요청했다.
“우리 둘만 있는 시간은 지금까지 충분했죠. 우리가 원하는 건 공개된 장소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울리는 시간이에요.”
호텔 바에서 여자는 소녀처럼 조잘거렸다. A와 B는 대중예술과 AI의 작용에 대해서 가벼운 토론을 했고, 각자의 공식 일정 중에 있었던 일, 그리고 홍콩이라는 이질적 사회에 대해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뭐라고 딱 잘라 말하기가 어려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어떨 때는 선생과 제자 같은, 그러다가 오빠와 여동생 같기도 하고, 또 그러다가는 논쟁을 즐기는 동료, 또 가끔 둘의 분위기는 걱정이 많은 엄마와 아들로 돌변하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 두 사람은 몹시 예민하고 달뜬 상태였다.
매우 불편한 마음과 피곤한 몸으로 그 자리에 합석해야 했던 진태우는 때로 투명인간처럼, 때로는 오랜 친구처럼, 때로는 여행 매니저로서 그들의 옆에 있었다.
A와 B는 영화의 원작자와 음악감독으로 처음 만났다. 당시, 무례하고 오만한 스캔들 메이커로 악명 높던 뮤지션 B는 A를 만나는 순간 그녀에게 영혼을 맡기기로 결정하고 말았는데, 그녀의 냉담함에 절망하여 석 달을 앓아누웠었다고 한다.
A는 오래전 이혼한 상태였으며 이혼한 전남편은 대학생이 된 딸과 함께 미국에 살고 있었다. 그 딸은 B의 팬클럽 열성 회원이다. A는 딸에게 B가 엄마와 얼마나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인지 아직 말하지 못했다....... 이런 이야기들을 고스란히 듣고 있던 진태우는 이야기 끝에 놀라운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이 그들의 ‘첫날밤’이라는 사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A와 B는 3년간 한 공간에서 살고 있지 않았던가!
남자에게 이 사랑은 지금까지의 난잡하고 무책임한 연애질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 사랑으로 인해 자신은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좀 더 종교적으로 말한다면 구원되었다고 믿고 있었기에 그 이외의 것을 감히 바라지 못했다. 즉, 육체적인 관계가 없다 해도 그는 스스로 영원히 여자에게 속한 존재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여자를 안고 싶은 욕구를 참아낸다는 것은 고통이었다.
A는 처음에 당연히 이 청년과의 관계를 믿지 않았다. 그러다가 B의 사랑을 이해하게 되고 그녀 또한 B를 사랑하게 되었다. 당연히 육체적인 욕망도 있었다. 그러나 두려웠다. 남자는 너무나 젊고 아름다웠다. 반면 여자는 거울을 볼 때마다 점점 실망스럽고 서글퍼졌다.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남자 앞에서 옷을 벗고 싶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는 불가능한 게 있지. 내가 한참 아름다웠 던 때를 그에게 보여 줄 수 없다는 거야. 영원히...
그러다가 두 사람이 밀실을 벗어나기로 결심했을 때, 그 결심 속에는 그들의 사랑을 사회적이고 육체적인 관계로 발전시키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진태우는 머리가 띵해지면서 코끝이 시큰했다. 자기 고객의 숭고한 사랑에 대한 감동? 그보다는 자기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중요한 사람이 되어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무한히 감격스러웠을 것이다.
밤이 깊어 A와 B는 함께 방으로 들어갔고 방문이 굳게 닫히는 모습을 본 뒤 진태우는 돌아섰다. 잠들기에는 가슴이 너무 벅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