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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양이 Oct 05. 2024

11. 밀실 밖의 홍콩 (3)

새벽 6시. 요란한 알람 소리에 깨어난 진태우는 서둘러 호텔 방을 나섰고 그 층의 엘리베이터 앞에서 B와 마주쳤다. 그는 오전 스케줄 때문에 먼저 호텔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진태우는 B의 얼굴을 슬쩍 살펴보았다. 

  ‘얼마나 뜨겁게 간밤을 불살랐을까?’

   부럽고도 궁금했다. 남자의 얼굴은 분명히 환희로 가득한 것이었는데 그와 동시에 피로, 그리고 뭔지 알 수 없는 초조감도 엿보였다.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남자는 급히 메모를 써서 진태우에게 맡긴 뒤 호텔을 떠났다. 여자에게 전달될 메모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전에 시간 있다고 했죠? 홍콩의 중심부에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가 있어요, 가게의 간판들을 읽으며 그 길의 꼭대기까지 혼자서 올라가 봐요.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서, 내가 뭔지 말하지 않아도 당신은 알아낼 수 있을.......”

  택시가 오는 바람에 글은 여기에서 끊겼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침 스트레칭을 하고 있던 A는 B가 쓴 메모를 전해 받자마자 설렘을 감추지 않은 채 허둥댔다. 즉시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로 가자고, 진태우를 거의 졸라댈 지경이었다. A의 공식 일정까지는 두 시간가량의 여유가 있었다.      

  목적지인 홍콩의 센트럴에 도착하자 A는 진태우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이렇게 같이 있어 줘서 고마워요. 이따 저녁에 약속 장소로 갈게요.”

  “혼자 가시려고요?”

  “그럼요. 혼자서 올라가 보라잖아요. B가.”

  이렇게 말하며 A는 궁금증과 기대감으로 수줍게 웃었다. 나이에 맞지 않게 소녀 같은 미소였다.      



4.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길고 길게 이어진 에스컬레이터를 옆에 두고 A는 그 옆으로 난 계단을 힘겹게 걸어서 올라야만 했다. 에스컬레이터는 내려가는 방향으로만 운행되었기 때문이다. 아침인데도 날씨가 더웠고 계단은 울퉁불퉁 불편했다. 고만고만한 가게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짐을 나르는 거친 남자들이 여자의 어깨를 치며 지나갔다.


  ‘B는 이 힘든 길을 올라가면서 힘들지도 않았나? 하긴, 젊으니까.......’

  여자의 생각은 처음엔 이 정도였다.

  그러나 계단을 오르고 또 올라도 언덕은 끝나지 않았다. 간판을 읽는 것도 처음에는 흥미로웠지만 점점 짜증스러웠다. 날씨가 문제였다. 도시 전체가 습식 사우나나 다름없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야 되는 거야? 나한테 왜 굳이 여기를 올라가라는 거지?’     


  계단을 오른 지 30분. 궁금증과 기대 속에 의혹과 불만이 조금씩 퍼져 갈 즈음, A는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으며 그만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설마.......’

  그러나 설마 하는 마음은 계단을 하나하나 오를 때마다 짙은 단정으로 변하고, 그 단정이 가슴속을 할퀴기 시작했다. 그 상처는 점점 커졌다.     

  ‘그는 말하고 싶었던 거야. 그래 어젯밤....... 내가 너무 늙었다는 걸 느꼈겠지.’

  ‘청년의 힘찬 사랑을 상대하기에 난 너무 늙었어. 위로받기 위해 사실을 미화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야.’

  ‘어제 B의 계단 오르기가 흥미였다면, 오늘 나의 계단 오르기는 고역인 거지...’

  ‘그는 말할 수 없었을 거야. 우리의 사랑은 현실이 아니라고. 단지 밀실 속의 관념일 뿐이라고. 그래 인정해. 그리고 괜찮아.’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말해야 했어?’

  ‘이건 너무 비겁하잖아?.’


  생각이 거기에 닿으며 여자는 계단에 주저앉고 말았다.      

  불과 몇 칸의 계단 위에 언덕의 정상이 있었지만 A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아니, 알았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을 것이다.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부끄럽고 원망스러웠다. 화가 나기도 했다. 가슴속에 깊이 파인 상처에서 피가 흘렀다. 그러나 A는 소녀가 아니었다. 성숙한 여인이며 명성 있는 작가였다. 스스로 비참해지지 않을 만큼의 자존감이 충분한 여자였다.


A의 울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A는 엉덩이의 먼지를 털고 일어나며 망설임 없이 전화기를 눌렀다.     


  “진태우 씨? 오늘 저의 일정은 오후 네 시에 끝나요. 끝나는 대로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겠어요. B에게 전해 주세요. 미드레벨에 다 올랐고, 메시지를 잘 알았다고요....... 당연히 오늘 저녁 약속은 취소죠.... 아니, 혼자 갈 테니 날 찾지 마세요.”    

 

  전화를 마치고 A는 지체 없이 계단 옆의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숨을 헐떡이며 힘겹게 올라야 했던 높은 언덕을 에스컬레이터에 실려 아주 편하게 내려올 수 있었다.  



  그러나 평지까지 내려온 A가 택시를 타는 순간, A를 태우고 내려온 에스컬레이터는 서서히 멈춰 섰다. 그리고 잠시 후 방향을 바꿔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유감스럽게도 A는 이 장면을 보지 못했다. A가 그렇게 단호하지만 않았더라면, 아픔을 느끼며 휘청이는 시간을 잠시만이라도 스스로에게 허락했더라면, 관성처럼 하행하던 에스컬레이터가 언덕 위쪽을 향해 상행하는 그 광경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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