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식으로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의 바닥을 드러내 보인단 말인가? 겨우 이 정도의 관계에 결혼까지 생각해 보았단 말인가? 두 사람은 얼른 스스로를 반성하며 태도를 바꾸었다.
“발 아파? 업어줄까?”
“아냐, 그냥 신발을 벗을래.”
“나도.”
같이 신발을 벗고 흙길을 걸으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이제 어디선가 계곡물소리가 들려오거나 작은 구멍가게가 있어 삶은 계란이라도 먹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만 같았다.
그때 두런두런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 사람의 목소리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저 멀리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 돗자리를 펴고 누군가 앉아 있었다. 사람이 이렇게 반가울 수도 있을까? 둘은 무작정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은 초로의 부부였다. 50대 후반? 아니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60대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는 점이었다. 그 부부는 김준과 서신희에게 기꺼이 자기들의 도시락을 내주었다. 정갈하게 반찬을 해 담은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두 분은 이 근처 사세요?”
“아니요. 이리로 자주 소풍을 자주 와요.”
소풍! 아아, 늙어서 같이 손을 잡고 소풍을 올 수 있는 거였구나. 서신희는 눈앞에 있는 부부의 모습 속에 김준과 자신을 대입해 보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나 자상하게 젊은 남녀를 도와주었다. 발에 반창고를 붙여 주었고, 그 어딘가에 있다는 계곡까지 같이 가 주었다. 노부부는 걸을 때마다 손을 잡았고, 끊임없이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었다. 가끔 싱거운 장난을 하고, 별것 아닌 일에도 재미있다는 듯 반응해 주었다. 정말 영화에서 억지로 연출해 낸 이상적인 부부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는 동안 날이 어두워져 두 쌍의 남녀는 ‘소그랭이’ 부근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단 하나 있다는 여관을 찾아 부부의 차에 오르니 부부의 역사가 느껴지는 듯했다. 조금 낡았으나 힘이 좋은 세단이었다.
“두 분 자제분은 어떻게 되세요?”김준이 물었다.
부부는 대답을 조금 망설이는 듯하더니 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해 드릴게요.”
아, 실수였다. 뭔가 아픔이 있는 건데, 눈치 없이 그런 질문을 하다니....... 하지만 그런 아픔 때문에 저 부부는 더 오래 사랑을 지킬 수 있었을 것이라고 서신희는 나름대로 짐작을 해 보았다.
같이 밥을 먹고, 같은 여관에서 잠을 잔 뒤 두 쌍의 남녀는 아쉽게도 헤어져야만 했다.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받으며 김준이 말했다.
“서울에 오시면 꼭 연락 주세요. 꼭요!”
“호호 그래요. 덕분에 소풍이 즐거웠어요.”
부부를 태운 차가 멀어졌다.
전화를 통해 여정이 흐트러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매니저 송기석은 펄펄 뛰는 시늉을 했다.
“왜들 이러세요? 이래 가지고 어떻게 답을 얻겠습니까? 지금 전라도까지 쭉 코스를 연결해서 준비를 해 놓았단 말이에요.”
“아, 죄송해요. 그런데 걱정하지 마세요. 덕분에 좋은 걸 얻었으니까.”
이 말을 듣고 송기석은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책임도 면하고 답도 찾게 되었다면 더 바랄 게 있으랴.
김준과 서신희는 뒤늦게 송기석의 코스대로 즐거운 여행을 했다. 그리고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다시 한번 ‘소그랭이’에 들러 계곡을 찾아갔다. 알고 걷는 길은 두렵거나 지루하지 않았다. 반창고와 약간의 먹을 것도 미리 준비를 했다. 결혼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큰 볼거리가 없을지라도 알고 걸으면 편안한 길. 그리고 약간의 준비가 필요한....... 소그랭이의 계곡에서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했다.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김준과 서신희는 여행사에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하고 약혼 사실을 알렸다. ‘약혼’....... 구아정에게는 예사롭지 않은 단어였다. ‘결혼을 약속함’. 결혼을 약속했으나 사라진 남자가 있다. 그 약속은 언제쯤이나 지키겠다는 것인지.......
구아정과 B.J의 약혼이란 안수호에게는 좌절을 의미했다. 그럼에도 그들의 사랑이 맺어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사람이 안수호였다. 구아정의 부모는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을 천직이라 여기는 B.J가 사뭇 못마땅하고 못 미더웠다. 그런 구아정의 부모를 설득하는 일까지 안수호가 맡아야 했다. 너무 가혹했지만 안수호는 빈속에 깡소주를 퍼부으면서도 두 사람의 행복을 기원했었다.
그런데 B.J의 사랑의 약속은 아직까지 지켜지지 않았고, 안수호는 여전히 구아정을 지켜야 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결혼 준비로 바쁜 김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소그랭이의 노신사, 서울에 있다고 했다.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당장 약속을 잡았는데 노신사는 서신희를 빼고 김준 혼자만 나와 주기를 바랐다.
김준을 만난 자리에서 노신사는 가볍게 칵테일 한 잔을 마신 뒤 이렇게 말했다.
“그때 이 말을 미처 못 했네.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사실 우리는 부부가 아니야. 아주 오래된 친구, 아니 애인이라고 하는 게 맞겠지...... 난 집이 서울이야. 애들도 있고, 법률상의 아내도 따로 있다네......”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 김준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노신사와 헤어지자마자 김준은 서신희에게 전화를 했다. 무슨 얘기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그냥 서신희의 번호를 눌렀다.
서신희가 피곤하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응, 잘 만났어? 사모님도 안 오시고 남자들끼리만 만난 거지?”
김준은 서신희의 질문에 대답은 않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물었다.
“저기, 있잖아... 청첩장 돌렸어?”
“응, 온라인 청첩장 아빠한테 전했으니까 아마 시작하셨을 걸?”
김준은 이번에는 좀 더 오래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날 말이야, 우리 왜 거기서 내렸을까? 하필이면 소그랭이에서... 그게 무슨, 운명 같은 걸까?”
(다섯 번째 여행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