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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양이 Nov 15. 2024

28. 어디라도 가고 싶어요. (2)

제1권   마지막 이야기

  여인의 사연은 이런 것이었다. 


  사람 좋고, 유머 있고, 친절하고, 함께 있는 사람을 편하게 해 주는 남편. 처음에 여인이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게 되었을 때 정말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다고 한다. 친구들은 여인을 축하하다 못해 시샘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남편은 공인 아닌 공인....... 아내와 한 아이의 가장이 아닌 만인의 베스트프렌드였다는 것을. 시간 여행을 통해 8년 전 한 사건의 진실만 확인해 본 뒤, 이제는 남편을 ‘사회에 환원’해야겠다는 여인 


  이야기를 듣는 동안 구아정은 서서히 깨달았다. 어디선가 본 얼굴, 익히 알 만한  사연.......     

  그렇다! 그는 송기석의 아내였다!   

  

     

  안수호와 또 다른 여인은 가까운 기차역에 도착했다. 공주 부근에 조용한 수양관이 있었다. 일반인들을 잘 받지 않는 곳이지만 잘 아는 학예사에게 긴급부탁을 했더니 그곳에 며칠 머무르도록 허락해 주었다. 오래된 마음의 찌꺼기들을 정리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온천에 들른다....... 안수호는 대략 이런 프로그램을 여인에게 제시했다.

  “우선 공주에 얽힌 전설부터 소개를 할게요. 공주의 옛 이름이 ‘웅진’이잖아요......”


   그 옛날 한 남자가 곰과 결혼했다. 곰 아내는 자식을 낳고 남편을 사랑하며 열심히 살고 있었는데, 사실 남편의 마음은 늘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곰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날 남편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 버리고, 남겨진 곰 아내는 하염없이 남편을 기다리다가.......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여인은 중간에 말을 끊었다. 

  “내가 그 곰이죠...... 그 곰이 어떻게 됐는지는 알고 싶지 않아요.”


  기차표를 사고 승강장에서 기차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여인의 얼굴이 창백해지며 다급하게 물었다. 

  “기차가 떠나기 전에는 기차표를 환불할 수 있는 거죠?”


  그때부터였다. 떠날 수도, 떠나지 않을 수도 없는 여인의 ‘갈팡질팡’이 시작된 것은. 여인은 자신의 충동적인 선택을 자책하며 다시 집으로 가야겠다고 했다. 그러나 기차역을 나서다가는 이대로 집에 돌아갈 수 없다며, 또 마음이 바뀌기 전에 아무 기차나 타자고 했다. 그래서 또 다른 기차에 올랐는데, 이번에는 여행사에 맡겨 놓은 큰애에게 준비물을 안 줬다며 또다시 기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진태우가 급히 달려와 그 준비물을 받아갔다. 그러는 동안 여인은 자꾸 지쳐갔다.

   아마도 여인은 처절한 싸움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자기 마음과의 싸움을. 이제는 정말 떠나자 했을 때, 여인이 떠날 수 없는 상황은 거듭해서 벌어졌다. 아이 젖을 먹이다가 동행인 안수호를 놓쳐 버리고, 절대 만나고 싶지 않았던 친구를 우연히 만나고, 위치를 추적해 온 남편을 피해 숨고...


  시간이 흘러 기차역에 도착한 지 다섯 시간째. 간이매점에서 가락국수를 먹던 여인이 가락국수국물을 뒤집어쓰는 사태가 벌어졌다. 여인이 기차역의 샤워실로 씻으러 간 동안 안수호는 또다시 기차표를 바꾸러 가야 했다. 정말 답답하고 지긋지긋한 시간들이었다.     


  얼마 후, 어린애를 안은 채 승강장에서 초조하게 시계를 보고 있던 안수호 옆에 여인이 다가와 앉았다. 아직 머리에 물기가 남아 있었는데 어쩐지 평온해 보였다. 대 여섯 시간 동안 마음속에 들끓던 갈등과 미련과 회의가 잠잠해진 듯 보였다. 칭얼대던 어린애도 어느덧 잠들어 있었다.

  기차 진입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안수호가 물었다.

  “이젠 이 기차를 안 탈 이유가 더이상 없겠죠?”

  여인은 대답 없이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안수호가 다시 말했다.

  “이 기차표는 환불 못 합니다. 보세요, 지금 기차가 들어오고 있어요.”


  이 역에 도착해서 수십 번이나 보았던 그대로, 기차의 압도적인 소리와 불빛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여인은 조용히 기차가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차가 다시 떠날 때까지도 그대로였다. 안수호는 이제 여인이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윽고 여인이 입을 열었다.

  “노래 하나 부를까요?”

  그리고 여인은 정말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 인생 고달프다 울어본다고 누가 내 맘 알리요

   어차피 내가 택한 길이 아니냐, 웃으면서 살아가 보자......”

   이 노래 한 가락이 밤새 오락가락했던 여인의 번민과, 밤새 동분서주했던 안수호의 모든 수고를 위로해 주기에 충분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안수호의 입에서도 노래가 새어 나왔다.

  “인생은 나그넷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주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


   안수호의 노래가 끝나고 또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 여인이 입을 열었다.

  “매니저님 마음속에 큰 슬픔이 있는 게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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