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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잉어 Jan 09. 2021

아재의 봄날

2018년 3월 27일 서울 코엑스


'서울 가볼 만한 곳'
미세먼지 가득한 봄날.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초록 창의 도움을 구했다. 슥슥 스크롤을 넘기다 보니, 한 곳이 눈에 띄었다. 코엑스 별마당 도서관. 얼마 전 알쓸신잡에서 보고 '우와-' 했던 곳이었다. 나는 별 고민하지 않고 2호선 전철을 탔다. 오랜만에 간 삼성역은 여전히 바빴다. 미세먼지를 뚫고 번쩍번쩍하게 빛나는 전광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브랜드 숍, 이리저리 바삐 점심을 먹기 위해 걸어가는 직장인들. 멋진 옷을 입고 바쁘게 움직이는 젊은이들이 눈에 띄었다. 나도 왜인지 저들 틈에 끼어보고 싶어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이리저리 먹을 것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쉽사리 들어갈 수 없었다. 코엑스의 살인적인 물가 때문이었다. 그냥 바로 도서관으로 향할까 고민하다, 푸드코트가 눈에 들어왔다. 푸드코트에서 7800원짜리 짬뽕 한 그릇을 시키고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러다가 눈에 띄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말끔히 차려입은 중년의 남성이었다. 이미 밥을 먹었는지, 쟁반은 옆에 치워져 있고, 그는 가만히 앉아있었다. 빨리 점심을 먹고 자리를 뜨는 직장인과 대비된 그 '아재'는 왜인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나는 그 아저씨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보다가, 사람들을 보다가. 왜인지 쓸쓸해 보이는 아저씨를 보며 내 머릿속엔 온갖 상상이 가득했다. 은퇴한 아저씨인가. 회사에서 잘렸는데 가족들에게 말하기 미안해서 회사 왔다고 여기 그냥 오신 건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아재'였지만, 내가 느낀 '아재'의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오지라퍼의 습관적인 걱정을 잊기 위해 고개를 열심히 흔들고, 나는 별마당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곳은 생각보다 작았다. 마음속 올라오는 '실망감'을 잠시 접어두고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고민 끝에 고른 책은 <어린 왕자>. 자리를 찾아 어린 왕자를 읽기 시작했다. 앉은자리는 푹신하고, 배는 부르고.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사하라 사막에 비행기가 불시착을 해서~ 어린 왕자가 보아뱀을 그렸다 어쩌고 저쩌고. 이후 어린 왕자의 내용은 기억이 안 난다. 잠시 눈을 붙이고 엎드려 잠을 잤다.  

"피슈 피슈"
자고 있는데 옆에서 소리가 났다. 나의 단잠을 방해하는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왼쪽을 보니 어떤 할아버지가 앉아 계셨다. 쥐색 넥타이. 갈색 체크무늬 정장. 흰머리와 대조되는 검은색의 중절모를 쓴 할아버지였다. 나의 단잠을 방해했던 소리는 할아버지의 숨소리였다. 나는 힐끗 할아버지를 훔쳐봤다. 할아버지는 명함 뭉치를 들고 무엇을 적고 계셨다. 00 상사, 000주임. 010-XXXX-XXXX. 작은 수첩에 명함에 적힌 정보를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적고 계셨다. 오후 두 시. '이 할아버지는 왜 여기서 명함을 적고 계시지?' 궁금해졌다. 실례가 될까 말도 걸지 못하고 도서관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놀라운 점을 발견했다. 내 옆에 있던 할아버지와 똑같은 '아재'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낮잠 자는 아저씨, 책을 보는 아저씨들. 오후 두 시 서울 한복판, 코엑스 별마당 도서관에는 '아재'들이 왜 이렇게 많을까 궁금해졌다. "물론 할 일 없는 늙은 남자, 방황하는 늙은 남자 =은퇴한 남자"라 단언할 수 없다. 하지만 푸드코트에서 혼밥 하던 아저씨의 눈빛과 별마당에서 방황하고 있는 아저씨의 눈빛이 다르지 않았다는 건 확실했다.


미세먼지가 가득한, 날씨 따뜻한 봄날. 왜 '아재'들은 도서관에 박혀있는지. 서울에서 가장 바쁘다는 삼성역 한복판에서 왜 아재들은 방황하고 있는지. 나도 모르는 그들의 속 사정이 있겠지. 결국 어린 왕자를 다 읽지 않고, 도서관을 나왔다. 왠지 마음속 헛헛한 마음이 드는, 아재들의 봄날이었다.  


에필로그)
우리 집에도 방황하는 아재가 있다. 우리 아빠다. 오늘 나간다는 아빠를 보고 어디를 그렇게 가냐고 쏘아붙였다. 우리 아빠의 봄날은 나의 잔소리일까. 고양이와 단둘이 집안에 박혀있는 나날일까. 은퇴한 남자들은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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