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미가 심한 편이라 약한 어지럼증을 느끼며 차에서 내렸다. 치악산의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남산보다 높은 뮤지엄산에 왔다. 산 공기는 서늘했다.
주차장과 미술관 사이에는 높은 돌담이 있어서 미술관 방향으로 들어서면 주차장과 차단된다. 머리 위에는 흰 구름이 떠있고 산책로 옆에는 물이 흐르고 있다. 길 따라 발걸음을 옮기면 웰컴 센터가 나타난다.
미술관에서 첫 번째로 마주하는 작품은 긴 막대 위에 놓인 남자 흉상이다. 팔다리 없는 구릿빛 남자의 얼굴을 가까이 다가가서 이목구비를 찾으려 해도 분명히 있지만 제대로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빛이 들어오는 통유리 앞자리에 있어서 언제 봐도 역광이다. 천천히 조각상 주변을 뱅글 돌았다. 바닥에 작품 정보가 적혀있었다. 작가는 알베르토 자코메티 제목은 무제.
알베르토 자코메티, <무제>
잠시라도 언어에서 해방되고 싶어서 홀로 미술관에 왔지만 구릿빛 남자 얼굴을 보자 본래의 목적을 잊은 채 검색창에 <자코메티>를 입력했다. 비슷한 조각상이 여러 개 나왔다. 앙상한 인간상, 불안하고 외로워 보였다. 속세를 산 아래 두고 온 나처럼.
도슨트의 작품 설명이 있었다. 자코메티는 인간이 다른 무엇으로 환원되지 않는 귀착점을 보여주려고 작품에서 거추장스러운 모든 것을 제거했다고 한다. 자코메티의 친구인 장 주네는 자코메티 예술은 존재의 비밀스러운 상처를 찾아내어, 그들을 아름답게 비춘다고 했다. 끝으로 도슨트는 자코메티의 말을 인용했다.
“혹시 지금 누군가 때문에 힘들다면,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누구라도 자신의 추함, 어리석음, 악의를 넘어서서 사랑받을 수 있기 때문에 세월이 흐르면 곁에는 당신과 꼭 맞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목구멍이 뜨거워지고 코가 시큰거렸다. 마른침을 세 번 삼키고 코를 다섯 번 문질렀다. 하마터면 오늘 처음 본 앙상한 구릿빛 남자 얼굴 때문에 눈물을 흘릴 뻔했다. 반년 째 냉전 중인 얼굴이 창백한 S 때문인가.
얼마 전 S가 미워서 미도리 일기장 한 권을 다 써버렸다. 문득 S라고 쓴 자리에 나를 넣어봤다. "나는 변하지 않는다. 나는 이기적이다.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말이 됐다. 나는 나를 미워하고 있었다. 자코메티가 추함, 어리석음, 악의를 넘어서 누구나 사랑받을 수 있다고 알려줬다. 우선 내가 나를 사랑하는 첫 번째 존재가 되어야지. 각각의 존재는 더없이 새롭고 대신할 수 없으며 누구나 사랑받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바라보니 구릿빛 남자는 미남이었다.
전시실을 옮겨가는 통유리창이 달린 복도에서 소나기를 만났다. 굵은 빗방울이 창문을 불규칙적으로 두드리고 작은 물방울끼리 뭉쳐서 유리창을 타고 흘렀다. 노출 콘크리트 벽에 기대어 홀로 빗소리에 잠겼다. 비로소 나를 사로잡고 있던 미움의 언어에서 잠시 해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