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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mz Oct 16. 2018

나는 콜드플레이(Coldplay)를 실패했다.

그리고 '취향'의 이야기



나는 콜드플레이를 실패했다.




 취향은 바뀔 수 있다. 목숨 바쳐 좋아하던 것도 싫어질 때가 있고, 죽기보다 싫어하던 것이 좋아질 수도 있다. 조금 극단적이게 말하긴 했지만, 이만큼 극적으로도 바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요즘은 무엇이든 함부로 단정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이 취향의 변화는 어쩌면 '나'의 변화에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취향 하나는 확고하게 유지하며 살아왔다 자부할 수 있었지만, 최근 들어 분명 다른 취향을 맞이한 것들이 몇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음악 취향. 개인적으로 콜드플레이(Coldplay) 류의 음악을 잘 듣지 못했었다.


 내가 생각하는 콜드플레이 류란 멜로디의 큰 변화가 없고 강렬한 후렴구도 없이, 전반적으로 몽환적이고 스무스하게 이끌어지는 음악이다. 물론 아닌 노래도 있다. 다만 내가 당시에 들었던 그들의 노래는 대체로 이런 느낌이었다. 예를 들면 'The Scientist' 같은. 이 노래를 듣고 당시 느꼈던 생각은 '도대체 언제 후렴구가 나오지.'였다. 


 그렇다. 나는 후렴구가 강렬하지 않은 곡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 사실 생소했던 것이다. 처음 이 노래를 친구가 좋다며 들려주었을 때, 어디서 반응해야 하는지 잠자코 기다리고 있다가 노래가 끝나버려 당황했었다.


 이를 어물쩍하게 넘기곤 집에 와서 혼자 찬찬히 다시 들었다. 분명 내가 쉽게 느끼지 못한 아름다움이 있을 것이리라, 꼭 이해하고 말리라, 다짐하며 듣고 또 들었다. 결론은 나는 콜드플레이를 실패했다.




수많은 당위성을 부수며,




 그러다 몇 년 후, 문득 제목이 기억나 다시 찾아보았다. 물론 이 때도 온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별 기대 없이 다시 재생한 이 노래는 기막히게도 당시 내 심장을 뚫고, 뇌를 관통한 기분을 선사했다.


 잔잔함 속에 중심을 잡고 있던 단단함, 거칠지만 다정한 보컬의 목소리, 우주 속을 날아다니는 듯한 반주와 담담하게 쓰인 아련한 가사까지. 내 취향과 참 많이 닮아있었다. 취향이 바뀐 것일까?

 

 예전의 나에게 음악이란 곧 즐거움이었다. 즐겁자고 듣는 노래인만큼 충분히 흥이 나야 했다. 또한 '강약 강약'이 확실해, 곡을 듣는 동안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그 '흐름의 롤러코스터'에 탑승하는 기분을 즐겨야 했다. 어쩌면 당시 나에게 음악은 '즐거워야 한다'는 당위적인 존재였을지도 모르겠다.


 처음 콜드플레이를 접한 건 학창 시절이었고, 지금까지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나에겐 생각지도 못한 구석이 꽤 변했을 것이다. 크게 보면 내가 속한 사회나 단체, 주변 환경도 변했고, 가까운 이들의 사고와 또한 나의 사고도 바뀌었다. 그렇게 내가 보는 풍경과 듣는 것들, 처한 상태나 마음가짐이 달라졌고, 당연히 나이도 차근차근 먹었다. 그때마다 필요로 하는 마음의 재료들에도 차이가 있었을 테고, 그에 맞는 것들을 찾아다녔을 것이다.


 이처럼 변해가는 주변과 나를 받아들이며, 지금껏 가져왔던 많은 당위성들이 깨졌다. 그럼과 동시에 깨진 빈틈 사이를 메우려 했다. 아마 그 틈 사이는 결핍되어있었던 '콜드플레이 감성'의 자리였으리라. '강함'이 아닌 '편안함', '낮의 활기'가 아닌 '새벽의 잔잔함', '힘이 넘치는 응원'이 아닌 '꼭 안아주는 따뜻함'을 알려주는 음악도 음악이었다. 예전 나의 위치에선 보이지 않았던 저편이었다.




취향 공간




 한 날은 친구와 노래 취향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결국 이 또한 스펙트럼과 연관이 있었다. 음악에 있어 절대적인 기준이야 없겠지만은 나름의 분위기를 생각해서 어떤 한 선 상에 놓아본다면 말이다. 굉장히 고요하고 적막한 음악의 정반대 편에는, 경쾌하다 못해 부서질 듯한 음악이 있을 것이다. 이 스펙트럼에서 볼 때 친구는 자신의 취향이 전자에 조금 더 치우쳐 있겠지만, 나는 후자에 조금 더 치우쳐있다 했다. 


 그렇게 보면, 나에게 있어 조용한 노래가 친구에겐 오히려 적당히 신나는 노래일 수도 있다. 콜드플레이의 노래도 마찬가지로, 청자가 스펙트럼 어디쯤에 서있는 가에 따라 다른 느낌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추가적인 생각으론, 취향에 있어서의 이 스펙트럼이 반드시 일직선 상은 아닐 것이란 점이다. 그러나 '취향의 위치론'에 대해 생각해보는 좋은 자료가 되었음엔 틀림이 없다.


 때문에 스펙트럼보다는 '색 공간'에 더 가까운 개념일 수 있겠다. '취향 공간'이라 부르면 될까? 극단적인 취향이 맞물릴 수도 있다는 점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아무튼 이 공간은 자신이 경험한 색깔들을 바탕으로 머릿속에 그려가기 때문에, 여기엔 분명 인식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 사라졌던 색깔은 앞서 말했듯 '이 색깔이어야만 한다'는 당위성이 깨지면서 생겨난 그 자리를 메운다. 개나리 같은 노란색만 노란색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점차 넓어져 내가 이동할 수 있는 범위는 더욱 커진다. 물론 주체적으로 이동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나는 계속 가만히 있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아마 공간이 조금 넓어져서, 알게 모르게 어느 한쪽으로 더 치우쳤을 것이다. 즉, 대상에 대한 호불호의 문제는 나의 위치가 변화함에 따라 달라졌다. 


 사실 취향이 '바뀌었다'라고 말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취향이 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이 넓어진 취향 공간을 거닐면서 다양한 경험을 접하고 있을 뿐이다. 이 과정에서 역시 원래의 위치를 더 뚜렷이 기억할 수도, 혹은 그보다 더 나은 곳을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위를 풀쩍 풀쩍 날아다니는 게 아닌 이상, 원래의 위치가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급작스럽게 '불호'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취향은 단순히 좋고 싫음이 아니라 '나의 위치'를 즉, '자신과 환경의 교류, 그리고 이에 엮여있는 사고 등'을 반영하여 해석되는 조금 더 복잡한 문제라고 본다.


 지금은 콜드플레이가 나의 플레이리스트에 빠지기 힘든 그룹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마음의 조용한 위로와 벽난로 같은 온기가 필요할 때, 문을 똑똑 두드리고 싶은 노래들을 담고 있다. 나는 언젠가부터 인생의 공간에 이러한 따뜻함을 찾아 넣고 싶었던 것 같다. 어느 날 한 친구가 들려준 콜드플레이를 문득 기억한 것은 그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후부터는 취향이 아닌 것들을 내 인생에 간혹 끼워보기도 한다. 취향이 아니라고 쉽게 단정 지었던 것들을 부수어가는 것이다. 


 이는 역시 잘 안 맞을 때가 많지만, 겪어보는 것이 결코 손해가 아님을 이제는 안다. 언젠가 생각보다 훨씬 좋아하게 될 수도 있고, 이를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한 마디 더 이야기할 수 있는 구실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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