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가 필요 없는 사람들

KAIST 융합인재학부가 찾는 사람들

by 김우혁

우리 학교에는 융합인재학부라는, 신설 전공 과정이 있다. 엄선된 좋은 책들을 100권 가까이 읽고, 성적이 표기되지 않는 대신 개인 프로젝트 결과물로 평가받으며, 멘토 교수님과 상의해서 자신의 관심사에 맞게 타 학과 수업을 골라 듣는다. 전통적인 대학 교육에 대한 해묵은 비판을 과감하게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대학 교육을 직접 받는 입장이자 교육 자체에 관심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LLM이 교육 혁신에 막대한 압력을 가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나는 융인부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부분은 융인부를 '매우 이상적'이지만 대학원 입시 혹은 취업에 대한 '현실적인 불확실성'을 감내해야 하는 곳 정도로 평가하는 것 같다. 즉 제도적으로 모든 상위 대학원 혹은 대기업들이 GPA를 보지 않는다고 선언한다면 당연히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저해상도의 분석일 뿐이다. 융인부에는 더 근본적인 역설이 들어 있다.

내 생각에 융인부의 가장 큰 메리트는 모든 학생들이 1:1 멘토 교수님을 배정받는다는 것이다. 그것도 중점 분야에 박식한 분으로. 교육의 본질이 그러하듯 대학의 본질 또한 나보다 훌륭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배우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융인부이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수님 방문을 두드리는 일과 융인부를 전공하는 일은 독립이다. 제도라는 장치로 묶여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타 학과와 다를 점이 없다. 그리고 제도로 묶인 관계는 제도 없이도 묶이는 관계를 결코 능가할 수 없다.​ 1:1 멘토링 시스템이 취지대로 구현이 되고 있는지 따져보기 전에, 왜 나는 애초에 교수님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뵙지 못했는지부터 자문해야 한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용기가 없어서 시도해 보지 못한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몇 번 시도해 봤으나 대화가 매번 겉돌다가 찝찝하게 마무리된 경우다. 나는 후자의 경험을 했다. 왜 대화가 겉돌았을까? 아는 게 없어서다. 피상적인 지식은 피상적인 질문을 낳는다. 한 번은 교수님 앞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나조차도 이 얘기를 왜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살면서 가장 창피했던 순간 중 하나였다. 교수님이라면 내가 두루뭉술하게 그리는 그림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정확히 어떤 지식이 필요한지 판단해 주실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항상 그런 기대를 갖고 찾아갔지만, 유의미한 진전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조차도 모르는 내 관심사가 융인부에서 멘토링을 받고 유연한 커리큘럼을 밟는다고 해서 구체화되리라는 기대는 무책임한 것이다.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흥미라는 것은 상당히 유동적이다. 가용성 편향과 확증 편향에 매우 취약하며, 사실은 그런 인지 편향들의 결정체가 관심사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나이가 어릴수록 현재 관심사가 가까운 미래에 바뀔 확률이 매우 높다. 익숙하지 않은 경험을 밀도 높게 할수록 더 빠르게 변할 것이다. 융인부의 중점 분야라는 제도는 꽤 구체화된 관심사를 요구하는데, 그 폭이 좁아질수록 유동성에 더욱 취약해진다. 중점 분야에 최적화된 커리큘럼을 따르다 보면 유동성에 대응해낼 만큼 충분한 넓이의 배경지식이 부재할 가능성이 크다.


다만, 이미 특정 분야에 있어 상당한 모멘텀을 갖고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랜 시간 자발적인 노력을 들여 전문성을 갖추었고 새로운 무언가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실력이 된다면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굳이 융인부를 전공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 마디로 결론 내리면, 융인부가 찾는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융인부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인 것이다. 혁신적인 교육 체제에 가장 잘 맞을 사람들은 굳이 제도의 혁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