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물은 먹어요
낯선 공간에 가면 고생을 많이 하는 편이다. 특히, 먹거리에 대한 민감도가 높아서 물갈이도 하고 배탈도 잣아 해외여행에 필수품이 배탈약이다. 한국 아니면 보기 힘든 환(丸)은 꼭 챙긴다. 이런 개인적 아픔을 알기에 얼마 전 해외에서 손님들이 왔을 때 나름 신경을 많이 쓰는 게 식사자리다. 회사 일로 두 명이 왔는데 한 명은 프랑스인, 다른 한 명은 홍콩 출신의 바이어다. 준비 없는 주말 저녁 식사를 해야 했다.
보통이라면 주중 미팅 후 가벼운 식사를 했을 텐데 바이어 쪽 요청으로 주말에 급하게 미팅을 하게 돼서 사전에 식당 예약 없이 먼저 업무를 보고 저녁 시간이 돼서 간단한 식사를 청했다. 미팅 전에 사전에 한국 전통음식이라는 큰 카테고리만 정하고 나갔다. 주말이고 예약을 한 것도 아니라서 미팅 장소인 일산 소노캄 호텔 주변에 있는 평양냉면과 녹 누전이 맛난 을밀대를 생각했다. 넓은 의미의 한국 전통식이고 마침 더운 날씨라 시원한 냉면에 대한 기대로 제안했더니 점심에 얼음이 나오는 냉면을 먹었다고 다른 음식이면 좋겠다고 한다. 시원한 냉면을 강조하면서 얼음이 나온 게 신기하다는 듯 한국에서는 얼음이 나오냐고 재차 묻는다. 아마도 프랑스도 그렇지만 중국인들의 식습관에 차가운 음식, 특히 얼음이 생소했을 것이다.
플랜 B를 발동했다. 단순하게 차가운 게 안되면 뜨거운 국물을 제안했더니 좋다고 했다. 대신 고기와 맵지 않으면 좋겠다는 '심플한' 요구사항을 넣었다. 들을 때는 쉽지만 막상 해보면 어려운 일이 있는데 바로 한국에서 뜨겁지만 고기가 없고 맵지 않은 음식을 찾는 일이다.
경험상 식당에 가서 기본 메뉴에다 빼 달 하고 하면 잘 안 먹힌다. 소위 말해서 안 먹는 거면 알아서 빼고 먹어라 식이 아직도 많다. 게다가 우리가 간 곳은 고기국수가 유명한 식당이었다. 마땅히 다른 곳으로 가기도 애매해서 기다리다가 착석했다.
"주문할게요. 고기국수에 고기와 양념장을 빼 주세요."
"고기국수에서 고기를 빼면 맛이 안 나는데..."
"아, 이분들이 고기를 못 드셔요. 채식주의자들이세요"
"그럼, 국물은 괜찮아요? 고기 국물인데?"
맞다. 그러네. 순간 당황했다.
당황하는 내 모습에서 그들도 눈치를 채고, 고기 국물은 괜찮냐고 물었더니 괜찮다고 한다.
식사는 만족스러웠다. 한국인, 내가 제일 먼저 후루룩 고기 없는 고기국수를 5분 만에 다 먹었고 중국인은 국물 맛이 좋다면서 면은 반만 먹고 국물을 다 없앴다. 프랑스인은 한국인과 중국인의 식사가 끝나고도 한참을 더 천천히 국물과 면을 꼼꼼히 음미하며 먹었다.
둘은 내게 고맙다고 연신 인사를 했고 나는 고기국수에 고기를 빼준 식당 주인장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성패는 가르는 요소가 많이 있지만 이번에 처음 먹어본 고기 없는 고기국수가 분명 성공에 보템이 될 거라는데 한표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