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문장 부호.
아침 출근길.
바람이 나뭇잎을 하나둘 떨군다.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조용히 바닥으로 내려앉는 낙엽들. 어제까지 나무에 매달려 햇살을 품고 있던 잎들이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의 발밑을 기웃거린다. 나는 무심히 걷는다. 이어폰을 꽂고, 바쁘다는 얼굴로 스치듯 그 길을 지난다. 하지만 문득,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혹시 내 삶도 저 낙엽처럼, 아무 말 없이 무언가를 천천히 내려놓고 있는 중은 아닐까.
잊은 줄 알았던 것들.
괜찮은 척, 익숙한 척, 넘기고 있던 감정들. 가을이라는 계절이 오면 그런 것들이 자꾸만 바닥에 드러낸다.
아무도 보지 않는 틈에서, 천천히 무너지고 쌓이고 흩어진다.
햇살은 밝고 공기는 서늘한데, 마음은 어쩐지 무겁다. 출근길은 발보다 마음이 먼저 지쳐 걷는 길이다. 그래서 아침의 나는 온통 물음표다.
“지금 가고 있는 길이 맞는 걸까?”
“이 선택이 정말 옳은 걸까?”
“어제의 나는 왜 그 말을 삼켰을까?”
물음표는 단지 궁금증이 아니다. 그건 방향을 묻는 신호이고, 앞으로 가도 되는지를 조심스레 물어보는 마음의 손짓이다. 남들이 성과를 걱정할 때, 나는 의미를 걱정한다.
길을 걷고는 있지만,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는 아침시간.
그래서 매일 같은 길을 걷고 있으면서도, 마음속 풍경은 매번 다르다. 그렇게 출근이라는 거대한 문장 속에서, 물음표 하나를 꺼내 쥔 채, 또 하루를 시작한다.
회의 시간.
정적이 흐른다. 질문을 던졌지만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다. 사실 다들 듣는 둥 마는 둥, 모니터 아래로 슬며시 시선을 내리고 있다. 누군가는 바탕화면을 클릭하고, 누군가는 입에 펜을 물고 깊은 사색에 잠긴다. 회의록 창엔 ‘참석’이라 쓰여 있지만, 마음은 이미 퇴근한 사람들. 그 틈에서 나는 또다시 나를 소환한다. 이 회의에서, 이 관계에서, 이 자리에서 나는 어떤 문장을 쓰고 있는 걸까. 마음속 질문은 부메랑처럼 되돌아온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질문은 느낌표로 튕겨 올라온다. 작은 성취 하나에도 깜짝 놀란다.
“이거 정말 잘하셨어요”라는 짧은 한마디에 마음이 널뛰듯 뛰어오른다. 감정이 팝콘처럼 통통 튀어 오르고, 작은 안부 한 줄에도 마음은 풍선처럼 부풀다가 탁, 하늘 위로 날아가 버린다.
꼭 운동회 날. 달리기 꼴등 하고도 칭찬받은 아이처럼, 심지어 넘어졌는데도 “그래도 완주했잖아!”라는 말에 눈물 한 방울 맺히는 아이처럼, 내 안의 어린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이런 말 한마디에 너무 쉽게 감동하고 만다. 마치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시무룩하던 강아지가 간식 봉지 소리 한 번에 귀를 쫑긋 세우는 것처럼 말이다. 그 한 조각의 칭찬이면, 회의록도 다르게 보이고 지루한 월요일도 반짝이는 일기장으로 변해버린다.
느낌표는 언제나 나보다 먼저 뛰어가는 감정 같다. 나는 아직도 천천히 걷고 있는데, 그 녀석은 벌써 한참 앞에서 팔짝팔짝 뛰며 나를 부른다. 그리고 나는, 그 느낌표를 따라 잠시 뜨거워진다. 그게 비록 3분짜리 회의 속 순간이라도, 그 감정은 퇴근 후까지 은은하게 남는다.
아마 그래서 우리는, 내일도 다시 회의실로 들어서는 걸지도 모른다. 언제 올지 모를 느낌표 한 조각을 기다리면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점심시간. 나는 쉼표가 된다.
오전 내내 속도를 올리던 문장 속에서 이제는 한 글자만큼 쉬어가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진다.
그 작은 틈을 놓치지 않고, 나는 커피 한 잔을 들고 조용히 창가로 걸어간다.
햇살은 더 이상 눈부시지 않고, 바람은 서늘하되 매섭지 않다.
창밖의 풍경은 계절에 맞춰 말없이 물러나고 있고, 사무실 안의 소음도 마치 알람을 멈춘 듯 잠잠해진다. 나는 그 사이 어딘가, 쉼표처럼 멈춘다. 멈춘다기보다는 잠시 머문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달리기만 하던 문장 속에서 갑자기 놓인 쉼표 하나처럼,
그저 거기 있기만 해도 괜찮은 시간. 생산성도 중요하지 않고, 누구의 시선도 중요하지 않은 이 순간. 커피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김은 마치 내 마음속 복잡한 문장들을 천천히 데워주는 문장부호 같다.
생각은 자연스럽게 흐려지고, 복잡했던 마음은 마침내 제 호흡을 찾는다.
가을은 참 쉼표를 닮았다.
무언가를 멈추고, 정리하고, 그러다 다시 숨을 들이쉬는 계절.
나도 사람인지라, 그런 계절 앞에서 자꾸만 멈추고 싶어진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판단도 하지 않고, 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무는 연습을 하고 싶어진다.
바쁘다는 말이 습관처럼 붙은 삶에서, 그 모든 걸 떼어낸 나를 잠시 만나보고 싶어진다.
어쩌면 우리는 달리는 속도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멈추는 방법을 배우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쉼표는 단지 흐름을 끊는 기호가 아니라, 삶을 다시 호흡하게 해주는 은밀한 숨구멍이다.
하루가 저문다. 모니터 불빛도 어둑해지고, 커피잔은 텅 비어 있다. 할 일을 모두 마쳤는지는 잘 모르겠다.
메일은 여전히 몇 통이 읽지 않음으로 남아 있고, 대답하지 못한 메시지는 어딘가 알림 위로 쌓여간다.
그래도 나는 오늘 이쯤에서 조용히 마침표를 찍는다. 마침표는 단호한 작별이 아니라, ‘여기까지 해냈다’라는 작고 단단한 선언이다. 할 수 있는 만큼 했다면, 그걸로 충분히 의미 있는 하루였다. ‘조금 더 보다 이쯤에서’라는 마음을 배우는 것.
그것이 내가 직장이라는 문장 안에서 익혀가는 마침표의 기술이다.
일의 끝맺음뿐 아니라, 내 마음의 소진에도 하나의 마침표를 찍어주는 일. 그것이야말로 어른의 용기일지도 모른다. 일에는 마감이 있지만, 삶에는 여백이 필요하다.
오늘의 마침표는 내일의 첫 문장을 위한 쉼표이기도 하다.
딱 거기까지만, 딱 그만큼만 책임지기로 스스로를 놓아주는 것. 그리고 그 작은 마침표가 내일을 더 잘 살아낼 수 있도록, 내게 회복의 여지를 남겨준다.
결국, 하루를 잘 산다는 건 완벽하게 해내는 것이 아니라, 잘 끝맺는 연습을 꾸준히 해나가는 것 아닐까. 오늘도 조용히 내 하루에 따뜻한 마침표 하나를 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