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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선 Jul 19. 2022

다정한 타인

당신보다 내가 먼저 다정해지겠습니다


얼마나 좋았으면 '시'로 썼고, '산문'으로도 썼다. '다정한 타인'이라고 소리 내어 발음하면 절로 마음이 따뜻해진다. 조금 과장해서 잿빛 세상의 그늘이 걷히는 느낌마저 든다. 


'시'에서도 '산문'에서도 실제 겪은 일에서 글감을 가져왔다. 어떤 '문장'이나 '단어들' 또한 '인연'과 까닭이 있기에 끌리게 되는 것일까?  내가 글 속에서라도 부려놓고 싶었던 나를 스쳐간 '다정한 타인'들은 한결같이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마치 깨끗한 비누향기를 남기고 스쳐 지나간 사람들처럼 여운을 남겨주었다. 물성은 사라졌지만 향기만은 오래오래  남아있다. 이상한 일이 아닐 없다. 


지난 토요일, 잊고 있었던 '다정한 타인' 이 다시 소환되었다. 남산 타워가 보이는 서울의 어느 길. 가파른 언덕길의 아래편에 위치한 식품점으로 전에는 '비건 스페이스'라는 상호로 비건 식품만 판매하던 곳이었다. 비건 스페이스 오픈 초창기에 몇 번 들렀던 기억이 있다. 어떤 사정인지 주인이 바뀌었고, 논 비건 제품들도 한편에 놓고 판매한다는 것 또한 우연히 알게 되었다. 식품점이지만 창가에 테이블을 붙여놓고 비건 라테를 마실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곳은 전문 카페가 아닌 식품점에 딸린 간이 카페 정도라고 하면 될 것 같다. 뜨거운 햇빛이 쏟아지는 한 여름 언덕길은 뿜어져 나오는 열기로 후끈거렸다. 오후에 소나기가 내릴 거라는 일기예보도 있었다. 바구니에 다양한 비건 식품들을 골라 담은 채 계산하는 사람들 뒤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다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혼자서 들어간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저, 커피 한잔 마시고 가도 되나요?"

" 네, 그럼요"

" 저, 그럼 오트 라테 따뜻한 걸로 한 잔 주세요"

" 네 알겠습니다."

" 참, 그리고 저기 저 쿠키 비건이죠? 쿠키도 하나 주세요"  

" 네 그럼요 비건 쿠키예요"



포장이 되어있지 않은 채 유리병에 들어있는 쿠키들이 언제부터 거기 있었을까 의심이 들어와 망설임 끝에 한 마디를 더 물었다.

"그런데 저 쿠키 혹시 만들어놓은 지 오래된 건 아니겠죠?"

그러자 살짝 동그라진 눈으로(결코 불쾌한 표정이 아닌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상대가 말했다.

"아녜요 절대 아녜요 신선한 쿠키예요, 걱정 마세요"

그는 외국 여성이었다. 황금빛 머리카락은 가늘고 부드러워 보였다. 한국말을 꽤 하는 편이었다.


보통의 카페에서처럼 내 커피를 들고 내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진열된 상품들을 둘러보며 커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그가 말한다.

" 자리에 가서 앉아계시면 가져다 드릴게요"

" 아, 네"

나는 얼른 창가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토요일 오후인데 참 오가는 사람이 없는 비스듬한 창 밖을 보고 있자니 아무런 생각도 나질 않는다. 참았던 열기를 터뜨리듯이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때마침 그녀가 커피와 쿠키를 들고 왔다.

" 맛있게 드세요"

" 감사합니다."



특별할 것도 특별하지도 않은 대화는 이게 다 였는데, 딱 거기까지의 거리와 배려가 있는 몇 마디가 내 기분을 상쾌하게 했다. 비가 내려 열기가 식어가는 길을 바라보며 뜨거운 커피를 천천히 마셨다. 비건 버터의 향과 쵸코칲이 씹히는 쿠키는 그녀 말대로 신선했고 질 좋은 오트 밀크로 만든 라테도, 투박한 잔도 좋았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을 텐데 나는 그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어떤 잡념도 없이 마냥 거기 있었다. 마침내 커피 잔이 비고, 소나기도 그쳤다. 깨끗하게 비운 찻 잔과 쿠키 접시가 담긴 쟁반을 들고 그녀에게 갔다.


" 커피 맛있게 잘 마시고 가요"

"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비가 그친 내리막 길을 걸어 역으로 가며 한 번쯤 더 와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아르바이트생이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내가 혼자 가 비 오던 날 커피 마시고 갔던 얘기를 하면 알아볼 것만 같았다. 꽤 다정하게 남을 기억 하나가 생긴 셈이다. 만약 그녀가 거기서 판매하는 쿠키를 의심하는 듯한 내 물음을 불쾌하게 여겼다면 어땠을까? 말로 뱉지 않아도 기분 나쁜 에너지를 품은 채 커피를 내렸다면 어땠을까? 소심한 나는 분명히 '다정한 타인'을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은, 아니 나는 생각보다 훨씬 더 작은 것에 반응하고 마음이 움직인다는 걸 안다.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이일지라도 보이지 않는 에너지는 연결되어있기에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옛 말도 전해오는 듯하다. 이해관계로 얽힌 사이에서 오고 가는 입에 착 착 붙는 그런 말 말고 그냥 좀 순한 말을 하고 살아야겠구나 싶다. '순한 마음'으로 살다 보면 저절로 '순한 말'이 나올 터 장식 없이 수수한 차림으로도 어여쁜 그녀, '다정한 타인' 에게서 나는 또 배운다.


만약 당신의 마음이 사납고 거칠어져 쏟아내는 말마다 그렇다 해도, 내가 먼저 순한 말을 하며 살겠노라고. 살고 싶다고 기특하게도 오늘은 그런 생각을 한다. 작심삼일, 아니 돌아서면 금세 잊어버릴 약속일지라도 지금은 그렇게 순한 마음이 되어 내가 먼저 다정한 사람이 되어야겠다 굳은 결심을 해본다. 이게 다 '다정한 타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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