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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밀도 Apr 11. 2021

08. 오해

노인 재정 / 청년 지민

재정/지민


지민과 재정 사이의 냉랭한 기운은 좀처럼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평화를 유지할 수 있도록 이모님이 회복되었고 광고업계에 피크 시즌이 와서 각자 정신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재정은 과거의 ‘박재정 과장’의 명성을 금방 되찾았다. 때마침 유행한 ‘뉴트로’가 재정을 도와줬다.     


최근 유튜브 알고리즘의 영향으로 30년 전의 드라마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신선하다고 인기몰이를 했다. 재정의 퇴사 전 마지막 광고에는 그 드라마의 주인공이 출연했다. 덩달아 재정의 광고도 3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주목을 받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재정에 대한 검증은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선배 K 국장은 재정에게 이번 시즌 가장 중요한 경쟁 PT를 맡겼다. A 기업이 대대적으로 보유한 다양한 제품군의 메시지를 통일성 있게 끌고 가려는 광고여서 이기면 5건의 경쟁 PT를 따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재정은 지민의 뺨을 내려친 그 날 이후 도리어 마음 편히 야근했다. 둘 중 누구도 먼저 연락하지 않았고 진수를 통해서만 서로가 바쁘다는 정보만 얻었을 뿐이다. 다행히 한이도 이모님을 잘 따랐고, 이모님도 한이를 정성스레 잘 돌봐 주었다.


재정은 계속되는 야근으로 피로가 몰려와서 평소보다 일찍 퇴근해서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내일 아침 7시에 당장 파일 수정을 해야하는 상황이었다. 불가피하게 집에서 작업을 하고 USB로 파일을 옮겨야 했다.  여분의 USB가 당장 필요해서 지민의 집에 잠시 들릴 수 밖에 없었다. 늦은 시간이라서 문구점은 문을 닫았다. 재정은 서둘러 지민의 집으로 향했다. 먼저 주차장을 살펴보니 지민의 차가 없었다. 발거음을 재촉하여 지민의 집으로 향했다.     


"이모님, 잘 지내셨어요?"     


"아이고, 한이 할머니. 오랜만이에요. 요즘 일하느라 바쁘시죠?"     


"몇 십 년 만에 하려니 힘에 부치기는 하네요. 한이 돌보는 것은 괜찮으세요?"    

 

"그럼요, 한이도 잘 따라주고 얌전해요. 얼마나 기특한지 몰라요."     


"이모님께서 잘 봐주셔서 저도 딸애도 마음 놓고 일을 할 수 있네요."     


"그 옛날 다 희생했는데 한이 할머니는 이제라도 하고 싶은 일 하며 살아야죠. 그런데 한이 엄마도 없는데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요즘 많이 늦게 와요."     


"아 네, 급하게 뭐 좀 찾아야 해서요. 저도 바로 가야 해서 딸애 얼굴을 못 보고 가요. 괜히 신경 쓸 수도 있으니 저 다녀간 이야기는 하지 말아주세요."     


재정은 이렇게 말하고는 멋쩍어서 서재로 들어갔다. 분명히 서랍에 급할 때 쓰려고 몇 개 사둔 것이 있을 텐데…. 가끔 지민이 집에서 야근하고 잠도 덜 깨고 출근하러 나가면 작업하던 파일을 가져가는 것을 깜박했다. 고해상도의 이미지가의 용량 문제로 메일로 보내지 못할 때가 많았다. 미리 USB를 여러 개 여분으로 사두고 재정이 자료를 넣어서 회사에 가져다 주고는 했다. 맨 밑에 있는 서랍에서 USB를 찾고 나서려는데 책상에 A 기업을 타깃의 기획 문서가 올려져 있었다. 궁금해서 열어 볼까 하다가,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방문을 나서는데 지민이 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엄마, 지금 남의 방에서 뭐 하는 거야? 이제 성공의 눈이 어두워서 딸 자료 훔쳐보는 거야?"     


"지민아, 엄마는 USB 찾으러 온 거야. 네 자료는 한 글자도 보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어. 어떻게 나를 그렇게 오해할 수 있니?"     


"그럼 왜 나 몰래 왔어?"     


"너가 엄마 보는 거 불편할지도 몰라서 피해서 왔어."     


"알기는 아네."     


재정은 도무지 대화를 더 이어나갈 기운이 없었다. 지민이가 왜 저렇게 날카롭게 구는지 이해할 힘이 없었다.


"엄마, 그만 갈게."     


지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모님은 싸한 모녀의 분위기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이가 할미 가지 말라고 바지를 붙잡고 늘어졌다. 한이를 자상하게 잘 타이르고 꼭 껴안아 주고는 지민의 집을 나왔다.     


재정은 자신이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지민과 어긋나는 것을 보니 허무해졌다. 스스로를 찾는 일이 이렇게 고통을 받아야 하는 일이던가? 지민이가 어릴 때는 아이를 놔두고 이기적으로 자아실현을 한다는 시선과 싸워야 했고, 노인이 된 지금도 재정의 열심은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억울함이 목을 짓눌렀다. 보란 듯이 더 잘 해내고 싶어졌다. 자신에게도 나름의 전문영역이 있고, 침범한 것은 자신이 아니고 당신들이라고 알려주고 싶었다. 지민이도 A기업의 경쟁PT를 준비하고 있으니 더욱 사력을 다해 지민이를 이겨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력으로 굴복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의욕이 넘치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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