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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Feb 15. 2019

외로움의 맨얼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외로워서’ 누군가에게 기대고, 의지하고 싶은 마음에 연애를 시작했던가.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사회가 원체 이런 식으로 먹은 탓이다’라며 구조적 문제라고 낙담하는 것보다는 ‘내가 아직 좋은 남자를 못 만나서 그렇다’며 다분히 개인적인 퍼포먼스의 문제로 치환하여 생각하는 쪽이 훨씬 더 극복하기 쉽게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무엇보다 이 사회가 젠더 차별에서 비롯된 좌절감으로 사로잡혀 있는 여성들에게 던져주었던 해결책이 ‘당신이 괴로운 건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해서 그렇답니다’에서 비롯된 ‘로맨스 서사를 통한 구원’밖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곧 ‘너의 괴로움=외로움’이라는 가짜 수식을 완성시켰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역사학자 거다 러너는 저서 「가부장제의 창조」에서 가부장제 속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남성 가장들은 무력으로 경제권 독점을 독점하고, 여성을 사유재산 취급하기 위해 ‘존중받을 만한 여성’과 ‘존중받지 못할 여성(한 남성에게 귀속되지 않거나 혹은 모든 남성에게 제공되는 여자=선택받지 못한 여성 or 창녀)’로 나누는 인위적 구분 짓기를 도입했고, 그들을 가부장제의 노역자이자 부역자의 역할로만 세뇌해왔다”


이렇게 성별에 따른 위계 관계가 명확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여성들은 남성들이 전유한 생산수단 및 물질적 자원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 선택지밖에 없었다. 가부장들과 ‘협력적인’ 유대 관계를 맺는 일, 즉 남성에게 존중받고 사랑받는 존재가 되어 한 가정의 안사람 혹은 첩실이 되거나 또는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가부장과 혈연관계로 맺어지는 방법 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어쩌면 여성들이 오랜 세월 ‘좋은 남성과 연결’되고자 하는 고질적인 강박에 시달려야 했던 이유는 자주권, 주체성의 상실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좋은 남성이란 여성이 사회 속에서 겪어야 하는 경제적, 신체적 위협들로부터 버팀목이 되어줄 ‘가장의 조건을 갖춘 이’를 지칭한다. 때문에 좋은 남성과 연결되는 데 고배를 마셨던 여성들은 단순한 감정적 상처가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했다. 간택에서 탈락한다는 것은 곧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는 생산 수단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을 차단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사회적 열외’라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감정에 선조들이 붙였던 이름은 외로움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심리적 공허, 감정적 허기라고 부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자아실현, 자신의 손으로는 쌓을 수 없는 탑, 완성할 수 없는 그림… 그것은 외로움이 아니라 박탈감, 좌절감이니까. 







 

이제 더 이상 가부장제 정치에 놀아나서는 안 된다. 여성의 감정적 허기를 극복하는 방법이 ‘사랑받는 여성’이 되어 그들의 구도 속에 안착하는 것이라는 선전에 더 이상 속지 말자. 


현대 여성들이 느끼는 외로움의 감정들 중에서 남성에게, 가부장에 의존코자 하는 마음을 돌볼 수 있는 방법은 '더 예쁘고', ‘사랑스러운’ 여성이 되어 그들의 성은을 입는 것이 아니다. 4천 년 전부터 여성에게 씌워져 있던 모순적인 역할을 깨닫고 그로부터 탈피하는 것, 자아실현의 꿈을 남에게 의탁하지 않는 것, 자신의 경력에 부합하는 지위와 권력을 성취할 수 없게 투명한 유리창으로 가로막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항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 자신을 비롯한 다른 여성들을 대상화하고 타자화하지 않는 것이다. 


경각심을 가지고 ‘남자 주인공’ 없이는 완성될 수 없도록 세팅 되어 있는 우리 인생의 각본과 무대를 뜯어 고쳐야 한다. 메가폰을 잡고 캐스팅과 역할 분배를 전담하던 가부장들에게 찾아가, ‘내 인생의 무대에서 꺼져 달라’며 저당 잡혀 있는 감독권을 반환 요청해야 한다. 각본‧무대‧연출 감독‧캐스팅 등 모든 영역에서 통제권을 찬탈해야 한다. 언제까지 가부장들에게 '잘 보여' 좋은 역할을 따내겠다는 주변인 역할을 자처할 것인가? 


우리의 후배들이, 자녀들이 ‘주인공’ 배역을 따내기 위해, 혹은 제대로 된 ‘남자 주인공’을 얻기 위해, 감독 타이틀을 쥐고 있는 가부장들에게 몸과 영혼을 가져다 받치고 유린당하는 일에 브레이크를 걸기 위해, 이제라도 그들을 막기 위해, 오늘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적극적으로 팔을 걷어붙이고 각본 수정에 임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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