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시간에 이런 거나 그리고 앉아 있냐! 반 1등으로 들어온 녀석이라 기대를 했건만. 쯧쯧.
담임 선생님이 내 노트를 휙 잡아 올리고는 말했어. 담임의 뻐드렁니가 강조된 캐리커쳐가 눈앞에서 펄럭거렸지.
너는 앞으로 한 달 동안 야자 시간에 교무실에 와서 공부해.
죄송합니다.
허, 이 녀석은 울지를 않네?
네?
이 정도 말하면 다른 애들은 울던데, 너 독하구나.
독하다는 선생님 말에 기다렸다는 듯 눈물이 주르르 흘렀어. 한 번 터진 눈물은 터진 제방을 넘어오는 강물처럼 콸콸 멈추지를 않았어.
야, 이 녀석 봐라. 안 울더니 우니까 엄청 우네. 눈물 닦아.
당황한 선생님이 한 움큼 뽑아주는 휴지로 얼굴을 문지르며 생각했어.
신기하다. 신기하다. 웬만해선 울지 않는 내가, 울면 지는 거라고 생각하는 내가 이렇게 울다니. 그리고 깨달았지. 나를 울 수 있도록 만든 게 너라는 걸. 결코 꺼내서는 안 되는 방사능 물질처럼, 단단한 콘크리트 벽 속에 가둬두었던 눈물이 그렇게나 풍성하게 불어나 툭 터져버린 건 네가 내 옆에 있었기 때문이었어.
아침 영어 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 영어 프린트를 꺼내주세요.
복도와 교실 구석구석 퍼진 네 목소리에 반사된 아침 햇살은 얼마나 싱그러웠는지. 네 말에 바통을 이어받은 영어 선생님의 강의가 한창 이어질 즈음 자리로 돌아온 너는 볼 때마다 연예인처럼 느껴졌어. 수업 시간에 졸던 얼굴은 전혀 찾아볼 수 없던 생기 있는 표정. 너는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빛나는 아이였어. 음악을 좋아하고 사람을 사랑하던 네가 언젠가 연예인이 될 거라는 상상을 나는 은연중에 했던 것 같아. 넌 얼굴도 조막만 하고 피부도 하얗고 갈색 곱슬머리를 가진 인형 같은 아이였으니까. 너처럼 예쁜 아이는 교내 방송부로만 남을 게 아니라 TV에 나오는 게 어울릴 것 같았어. 영화 속 소피마르소처럼 커다란 헤드폰을 끼고 살짝 눈을 감은 네가 화면에 나오는 걸 상상했었어.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너를,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며 사는 너를.
망했어.
교실 창가 커튼에 얼굴을 파묻고 네가 울던 날. 나도 밤새 울다 와서 눈이 퉁퉁 부어 있었지만, 네가 울 줄은 몰랐어. 다른 애들이 울어도 네가 울 줄은 몰랐어. 수능 성적 따위에 전혀 관심 없는 줄 알았어. 네가 좋은 성적을 원했다는 게 나에겐 큰 충격이었어. 나와 다른 세계에 사는 줄 알았던 사람이 나와 같은 사람에 불과하다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었지.
이번 수능이 작년보다 어려웠대. 성적이 내려간 것 같아도 그게 아닐 수 있대.
내 위로에도 넌 꿈쩍하지 않았어. 커튼을 얼굴에 쓰고 세상에서 사라지려는 것 같았지.
누가 누굴 위로하는 건지, 읊조리며 둘러본 교실은 장관이었어. 누구 하나 웃는 사람이 없었어. 1999년 11월, 수능 다음날 풍경이 아직도 생생해. 죽을 듯이 싸우고도 져버린 패잔병처럼 눈물조차 말라버린 아이들이 넋을 잃은 얼굴로 앉아있었어. 누가 우리를 이렇게 만든 걸까. 누가 너를 이렇게 만든 걸까. 한겨울에도 피어날 꽃 같던 너를 이 초겨울에 지게 만들었을까.
너는 그날 이후에도 많이 울었겠지. 내가 모르는 시간에 모르는 장소에서.
대학 입시에 실패해서 울었을 것이고, 엄마를 실망시켰다고 생각해서 울었을 거야. 우는 자신에게 익숙해지지 않아 더 울었겠지. 나처럼 우는 게 지는 거라고 생각하며 우는 스스로를 미워했을지도 몰라.
그래도 희수는, 싸웠을 거야.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대한민국의 10대, 20대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온몸으로 매 순간 싸웠을 거야. 내가 아는 희수는 그런 사람이야. 자기가 언제 빛나는지 아는 사람, 그래서 싸워야만 했던 사람.
싸우느라 많이 아팠지. 많이 힘들었지.
그래서 나는 너에게 내 아픔을 보여주려고 해. 네가 혼자가 아니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
아마도 나처럼 아팠을 너에게, 아마도 ‘나’였을 ‘너’에게 내 이야기를 해줄게.
우주를 유영하다 내 마음이 닿는 게 느껴지면 잠시 지구 쪽을 돌아봐.
아픔을 딛고 일어났던, 아픔을 이겨내고 있는, 앞으로 닥칠 어떤 아픔에도 지지 않을 나를 봐.
이소영, 응원한다.
이렇게 말해준다면 고맙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