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요리하는 일상 Dec 31. 2020

초록 지붕의 앤 10.

캐러멜 소스와 크리스마스 푸딩

저를 키우기로 하신 걸 후회하시나요?



한 해를 앤으로 시작해서 끝을 다시 앤으로 마무리한다. 생일에 맞춰 넷플릭스 시리즈 속 앤의 생일 에피소드를 볼 수 있었고 자주는 아니었지만 시간이 있으면 앤의 요리들을 해보면서 1년을 앤과 함께 살았다. 물론 앤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간 날들도 많았지만.


무엇이 바뀌고 무엇이 바뀌지 않았을까? 

올해를 시작하면서 난 유난히 기대를 하거나 희망에 차 있지는 않았다. 그냥 다른 날들과 같은 하루를 시작했고 하루를 끝냈다. 그럼 내년에 나는 어떤 마음가짐일까? 사실 아직도 아무 생각이 없다. 어제와 같고 오늘과 내일도 같을 것이다. 숫자만 바뀔 뿐 마음속에서 크게 변한 게 없으니.

언젠가 20대 초중반 이후로는 사람이 크게 변하지 않고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지도 않고 믿음과 태도도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무엇이 바뀌고 무엇이 그대로일까? 잘 모르겠다. 그리고 언젠가는 사람은 자신을 평생 돌보고 키우며 살아간다는 말을 봤다. 나는 나 자신을 어떻게 키우고 있을까?

아직까지는 기쁨보다는 후회로 가득하게 키운 것 같다. 어쩌면 기뻤던 날들을 스스로 잊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유난히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든 한 해를 보내면서 특별히 잘 한 일도, 잘못한 일도 없지만, 그래도 자랑할 만한 일은 앤의 요리들을 해본 것, 그리고 마지막 날에 이렇게 마무리할 수 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 요리를 앤의 자두 푸딩(크리스마스 푸딩)으로 끝맺을 수 있었던 것에 대하여, 나름 자랑할 수 있을 것 같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 <Please Like Me> 요리를 하면서 크로캉부쉬를 망쳤지만 올해 크리스마스 때 한 자두 푸딩은 성공적이었다. 케이트 맥도널드의  요리법뿐만 아니라 다양한 레시피들을 찾아보면서 내가 잘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았고 푸딩은 아직도 냉장고에서 자리를 잘 지키고 있다. 올해 안에 다 먹진 못하겠지만 다행히 푸딩은 꽤 오랜 시간 두고 먹을 수 있다.




올해는 의도치 않게 트라우마와 관련된 매체들을 자주 접한 것 같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나의 과거에 대해서도 돌아보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알게 모르게 나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과거의 어느 사건에 대해서 오랜만에 이야기를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트라우마라고 해야 할지, 그냥 좋지 않은 기억이라고 해야 할지. 난 그 일이 있고 난 후로 어떻게 변했을까? 그런 일을 겪지 않았으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달랐을까?


넷플릭스 Anne with an E 시즌2 에피소드10


푸딩이 불 위에서 조금씩 익어가는 4시간 30분 동안 나는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에마 톰슨과 에밀리아 클라크의 <라스트 크리스마스>를 보았다. 작년에 예고편을 보다가 스포일러를 밟은 영화였지만 너무 보고 싶었다. 에마 톰슨은 늘 그렇듯 정치적이었지만 재미있었고 날카로웠지만 따뜻했다. 

그리그 그쯤에 <아쿠아맨>이라는 새로운 웹툰을 시작했다. 4년 전에 연재를 시작해서 1년 전에 완결 난 웹툰이지만 그 어느 웹툰보다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주인공의 트라우마를 다루고 그것을 회복하는 과정을 오랜 시간을 담아 그렸다. 과거의 트라우마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서툰 모습만 보여주는 주인공, 그리고 한번 마음을 연 사람은 절대 남에게 뺏기고 싶어 하지 않는다. 총 여섯 개의 시즌으로 완결이 난 이 웹툰에서 주인공은 얼마큼 성장했을까?

나는 성장 이야기를 좋아하는데, 나는 그런 이야기들을 보면서 얼마나 성장을 했을까? 




자두 푸딩에 들어가는 재료는 다양하고 만드는 사람마다 다른 재료를 넣을 수 있다. 익히는 시간도 각자 다르지만 4시간 이하로 걸리는 크리스마스는 푸딩은 없다. 예수와 12제자, 총 13이란 숫자로 열세 가지의 재료를 넣어서 만드는 이 푸딩은 크리스마스 푸딩이라고 불린다. 다양한 재료를 넣고 오래 보관할 수 있도록 알코올을 넣는 푸딩. 오래된 레시피지만 지금 먹어도 결코 맛이 없지 않은, 아주 달고 괜찮은 디저트이다. 특히 서두르지 않고 작은 열로 오래오래 익혀야 먹을 수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드는 음식이다.

아주 오래오래, 서두르지 않고, 푸딩이 잘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넷플릭스 Anne with an E 시즌1 에피소드7


아니, 후회하지 않아.
마릴라는 가끔 앤이 그린게이블스에 오기 전에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 10화 초록 지붕의 앤 9.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