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목소리를 들은 엄마는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엄마, 엄마! 듣고 있나?”
엄마 목소리를 듣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어린아이처럼 엄마를 간절하게 불렀지만.
“전화는 말라 했노?
”어엉...?“
”지 맘대로 영화사 다닐라꼬 대학도 때려치운 주제에!”
라는 퉁명스런 대답만 돌아왔다.
그랬다. 교대 다닐 때 영화동아리 활동하다 영화에 꽂히는 바람에 서울까지 올라와 몰래 영화사 면접을 봤었다. 영화사에 합격하자마자 부모님 몰래 대학을 때려치웠고, 그 사실을 안 엄마와 절연할 뻔했다. 전화라도 받아주시니 다행이네.
“교사는 내 적성에 안 맞다니까!”
“여자한테 최고 직업은 교사다! 존경받지, 방학 길지, 시집 잘 가지...”
“어우, 그 놈의 시집, 시집!”
반가움에 울컥했다가 어느새 화가 나 말대꾸하는 나였다. 엄마는 날 건드리는 뇌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왜 자신의 기준을 자식에게 강요하는 걸까.
그런데 어른 말 틀린 건 없다고, 지나고 보니 남편과의 결혼을 반대했던 엄마가 맞았다.
“낯 가리는 니 성격에 영화판이 어울리기나 하나? 대학 학비 땜에 그라믄 내가 어떻게든 해본다니까? 딴따라 판에 기웃대지 말고 공무원 시험 준비나 하든지!”
조용히 대학 나와 교사만 되어도 시집 잘 갈 딸이 영화판을 기웃거리는 꼴이 이해도 안 되지만 미래를 포기한 것처럼 보이나 보다.
“니 하는 짓 보면 한심한 네 아버지랑 똑 닮았다! 개발 제한 풀린 땅이라고 산 게 취소된 지가 7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구청을 헤매면서 붙들고 앉았다. 죽은 자식 불알 만지는 것도 아니고! 어휴... 네 동생은 또...”
아버지는 전 재산을 투자했던 땅의 개발 제한이 풀려 한방에 빚 다 갚고, 돈방석에 앉게 될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눈만 뜨면 구청, 시청의 공무원을 찾아다니는 바람에 돈 버는 사람이 없어 집안의 전기, 수도가 다 끊겼지만 아랑곳하지 않으셨다. 참다 못한 엄마가 보험 설계사 일을 시작했고, 나도 대학 들어가자마자 하루도 쉬지 않고 알바를 했다. 오죽하면 내 별명이 ‘알바몬’, ‘알바천국‘ 이었을까.
전화를 계속 하다간 엄마 혈압만 상승시킬 것 같아서 얼렁뚱땅 끊어버렸다. 자주 전화 드리긴 어려울 것 같다. 빨리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 드릴 수 밖에.
*
“진미래씨 어딨어!”
오PD가 입에 문 담배에 라이터로 불을 붙이며 물었다. 이때만 해도 지금처럼 ’웰빙‘에 신경쓰던 시절이 아니라서 흡연에 관대했다. 게다가 문화인, 예술인 의식이 있는 영화판에서 일하는 여자라면 술도 좀 마시고, 담배 피울 줄도 알고, 노래방에서 잘 노는 것이 미덕이었던 시절이었다.
홍보팀에 혼자 앉아 기사를 쓰고 있던 현팀장은 심기가 불편해진 얼굴로
“남의 팀 직원은 왜 찾아요?”
라고 물었다. 현팀장보다 더욱 심기가 불편한 듯 보이는 오PD.
“아니, 대표님한테 뭐라고 떠들었길래 <더 키친>을 다시 검토해보래? 이미 끝난 작품 아니었어? 나 지금 한중 합작 영화에 딱 꽂혀있는데!”
“막내가 시나리오 읽은 대로 얘기한 게 무슨 문제예요?”
내 식구 내가 갈구는 건 괜찮지만 남이 건드리면 못 참는다.
“그니까, 막내가 뭘 안다고 떠드냐고? 구석에 조용히 찌그러져 있으면 되지. 장대표는 요즘 젊은 애들 의견도 중요하다면서...”
그때 내가 홍보실 안으로 들어서자 두 사람의 대화가 뚝 멈췄다. 본능적으로 내 얘기를 하는 중이라는 걸 느꼈는데. 날 노려보는 오PD를 나도 똑바로 쳐다봤다.
다시 만난 오PD는 같은 여자가 봐도 섹시하고 예뻤다. 명문대 나오고 화술도 좋아 사람들 구워삶는 기술이 뛰어났었지.
‘나처럼 빽없고, 애교 없는 스타일하곤 차원이 달라. 과거엔 그 앞에서 기가 팍 죽었었지만 이젠 나도 이판사판이야.’
“여자들이 지저분한 섹스 얘기나 하는 작품이 흥행 될 리가 없잖아! 네가 뭘 안다고...”
“경험 많다고 나보다 더 시나리오 잘 본다는 보장 있어요?”
그 말을 들은 오PD는 물론, 오PD 때문에 열받은 현팀장까지 눈이 동그래져 나를 쳐다봤다.
“야, 너 왜 그래? 애가 하루 만에 이상해져갖고...”
당황한 현팀장이 말리려고 일어섰다.
“그렇잖아요, 경험 많다고 흥행작품 만들어 내는 바닥이면 장대표님이 찍는 것마다 흥행해야겠네요? 그런데 아니잖아요.”
“야... 회사 잘 돌아가네. 하늘 같은 PD한테 홍보팀 신참이 대들어?”
“진미래! 빨리 신문사에 가서 기사 돌려! PD님, 바쁜 시국에 이래야겠어요?”
흥분한 나와 오PD 사이에 끼어든 현팀장 때문에 물러난 오PD가 날 노려보더니
“앞으로 지켜볼게. 얼마나 잘 하는지!”
비웃음을 흘리며 나가 버렸다.
현팀장의 언짢은 기색을 보자 너무 심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차 사고를 당해 죽기 직전에 만났었던 오PD에 대한 기억 때문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현팀장에게 얼른 머리 숙여 사과하자 홍보 기사가 하나씩 든 회사 봉투가 한가득 쌓인 책상을 가리켰다.
“저거 다 돌리고 퇴근해!”
“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