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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홍 Nov 23. 2024

11화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1)


“확신이 없어서 안 줬을걸? 어떤 투자사에 어떤 작품을 줄지, 센 거랑 약한 거 묶어서 줄지 말지 대표의 전략이 많이 필요해. <자객>도 아직 투자 확정된 건 아냐. 주연배우가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야지.”

“정지우씨, 아직 도장 안 찍은 거였어요?”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거의 찍었다고 봐야지. 대표들끼리 합의했으니까.”

“오호...”     


그렇다면 정지우가 <자객>에 출연하지 못하게 할 가능성이 있는 거네? 이 와중에 정지우에 대한 고민까지 하는 나 스스로가 맘에 들지 않았다. 생각에 잠긴 날 보더니 현팀장이 혀를 찼다.      


“맡은 일이나 잘해. 안주연 위주로 홍보 기사 쓰라는 건 어떻게 됐어?”

“당연히 쓰고 있죠.”     


얼른 컴퓨터 앞으로 돌아가 기사를 쓰다가 다시 궁금해져 물었다.       


“‘시네마펀치’ 직원은 우리 회사에 안 와요?”

“안 오긴. 최근 담당자가 바뀌어서 그래, 백영석이라고, 대기업 투자사에 있다가 옮겼다던가? 엄청 잘 생겼대,”     


은밀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이는 현팀장을 한 대 맞은 멍한 얼굴로 바라봤다.      


“이름이... 뭐라고요...?”      


그때 현팀장이 회사에 들어오는 누군가를 발견하더니      


“양반 되긴 글렀다. 저기 오네!”     


라고 신기한 듯 말했다. 나는 얼빠진 얼굴로 팀장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봤다. 바로 전남편이었던 백영석이 직원들에게 환하게 웃으며 등장하고 있었는데!

한때는 저 미소에 반했었던 기억이 난다. 종가집 종손이자 명문대 나온 엄친아로 헬스로 다져진 다부진 체격 등등, 여자들이 욕심낼 만한 매력적인 남자였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인 걸 몰랐을 때까진.   

여기저기 인사한 전남편은 문이 열린 홍보실 안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현팀장과 날 발견하자 더욱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난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내가 달아날 곳을 찾는 사람처럼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현팀장이 의아해했다.      


“뭐하냐 너?”

“안녕하세요, 팀장님!”


백영석이 입고 있는 하얀 셔츠는 주름 하나 없이 빳빳했다. 그는 처음 보는 내가 궁금한 듯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아무 말 없이 보기만 하는데도 기분이 나빠졌는데.        


“이 분은...?”

“아, 처음 보죠? 여긴 홍보팀 직원 진미래씨고, 이쪽은 ‘시네마펀치’ 백영석 팀장님.”

“처음 뵙겠습니다!”     


백영석이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명함을 내밀었다. 처음 보긴 개뿔!

내가 적개심 가득한 눈으로 쏘아보자 백팀장이 당황했다.     


“명함 안 드리고 뭐해?”     


현팀장이 한마디 하자 그제야 정신이 든 나도 얼른 명함을 내밀었다.

저 인간을 또 만나다니... 그냥 스쳐 지나갈 인연이 될 순 없었니?      

생각해 보면 과거엔 홍감독이 데뷔 후 나와 같이 개발한 시나리오 때문에 백영석을 처음으로 만났었다. 알고 있는 과거와 계속 달라지고 있어 점점 불안해졌다.  

나에 대한 감정이 생긴 후에 소유욕이 강한 백영석은 홍감독과 나 사이를 의심하여 끊임없이 훼방을 놓았었다. 내가 봐도 홍감독은 그때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긴 했었지. 하지만 우린 파트너로서의 선을 넘은 적이 없었다.

그땐 바보처럼 나에 대한 백영석의 집착을 사랑이라고 착각했었다.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아, 장대표님이 부르셔서. 안에 계시죠?”      


현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백영석을 대표실 쪽으로 인도했다. 그가 얼른 사라져 줘서 다행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저 인간과 더 있었다간 무슨 헛소리를 늘어놓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복잡한 심경으로 백영석이 사라진 방형을 노려봤다.      


‘복수를 하고 싶어?‘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아니!‘     


곧바로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복수하려는 분노의 감정이 남아 있을 때의 얘기지, 다시 얻은 소중한 시간을 저 인간 때문에 일초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꿈만을 위해 전진할 것이다. 내 앞을 가로막는 것들은 그야말로 자객처럼 무자비하게 베어 버릴 것이다!          


*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백팀장이 장대표의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장대표가 시나리오가 든 봉투 하나를 쓱 내밀며     


“이것도 검토해 줘.”     


라고 말했다. 궁금한 얼굴로 시나리오를 꺼내 본 현팀장은 ’<더 키친>?‘이라고 중얼거렸다.      


“솔직히 나도 고민 중인데... 투자사 시선으로 어떤 지 좀 봐줘.”

“제 개인적 리뷰요? 아님 ’시네마펀치‘ 리뷰를 원하시는 건지?”

“선수끼리 왜 이래. 백팀장이 보고 좋으면 회사에 권유하는 거고.”

“<자객>때 하곤 다르시네요? 우리 남궁 대표님한테도 막 밀어붙이시더니 너무 소극적이신 거 아닙니까?”      

농담조로 말하는 백팀장을 보며 작게 한숨 쉬는 장대표.     


“홍보팀 20대 직원이 하도 좋다고 하니, 내가 올드해졌나 궁금해져서.”

“혹시 진미래씨요?”

“인사했나? 하, 보기엔 귀엽고 얌전한 줄 알았더니 좀 또라이야. 아니다 싶으면 물고 안 놓더라고.”

“하하하... 흥미가 생기는 대요?”

“하는 말이 일리도 있고... 그래도 자꾸 주제넘게 나서면 혼쭐을 내 줘야지.”      


백영석은 미래의 이름이 적힌 명함을 흥미로운 듯 바라봤다. 그런 백영석을 본 장대표가 짖궂은 표정으로      


“왜, 관심 생겨? 지금 사귀는 여자 있지 않아?”     


라고 물어 순간 당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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