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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홍 Nov 25. 2024

12화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2)


“에이, 대표님 왜 이러세요...”

“내가 현팀장 안 지가 하루 이틀이야? 쟤는 감당 안 될 테니까 꿈도 꾸지 마.”      


원래 남들이 하지 말라면 더 관심이 가는 법. 백영석은 이때 자신도 인지하지 못했다. 진미래에 대한 관심 등불이 하나 켜졌다는 것을.        


*     


바쁜 와중에 신문사 기자들과의 술자리가 잡혔다.

’데일리 스포츠‘라는 스포츠 전문 신문사로 이때만 해도 세 군데의 유력 스포츠지가 주름 잡을 때였다. ’조중동‘같은 일간지보다 위엄은 떨어져도 판매 부수 실적이 괜찮았을 뿐 아니라 주 소비층인 남자 관객들을 끌어들이려면 스포츠지의 영화홍보가 중요했다.

영화에 대해 호의적인 편이라 술자리도 자주 가졌는데, 유독 한 스포츠 신문사 부장이 색을 밝힌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필이면 그 신문사와의 술자리였는데.      


“바빠죽겠는데 굳이 이런 자리까지 가져야 돼요?”     


안 그래도 홍보 기사 쓰느라 골치 아픈데, 밤에는 술자리까지 있다니, 말이 좋아 술자리지 업무의 연장일 뿐이었다. 마음에 안 드는 표정으로 투덜대자 현팀장도 같은 마음이면서도 나를 나무랐다.       


“대표님도 오실 거야. 다 영화홍보 잘되라고 그런 거잖아.”      


가라오케인지 룸살롱인지 그 중간 어디쯤 되는 것 같은 인테리어의 술집이었다. 한마디로 럭셔리와 가성비의 중간 정도 되어 보였는데.

마담이 뛰어나오더니 친절한 태도로 담당 기자와 들어오는 신문사 부장을 단골인 양 반갑게 맞았다. 여자인 우리는 무시하는 듯한 태도라서 초장부터 기분이 나빴는데.

양주와 맥주, 마른 안주, 과일 안주가 줄줄이 들어온 후 장대표가 등장했다. 신문사 부장과 양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더니 잠깐 둘이 사라졌는데.  

현팀장이 아무렇지 않게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뽀찌 주나 본데...”

“뽀찌...요? 뒷돈?”


맞다, 뒷돈이 용돈처럼 오가던 시절이었지. 학교 선생님 면담하던 날, 엄마가 돈 봉투 문제로 고민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좋지 않은 관행들이 사라져서 얼마나 다행인지.  

안경 쓴 담당 기자가 명함을 내게 내밀었다. 나도 명함을 주며 서로 통성명을 했다.

현팀장과 나, 담당 기자인 남기자는 어색함을 달래기 위해 술을 주거니 받거니 했는데, 비슷한 또래라 그런지 말이 좀 통했다.      


“저 영화를 진짜 좋아해요. 대학 때 매일 하루에 한 편씩 영화를 봤을 정도로.”

“그런데 왜 스포츠지로 들어갔어요?”

“합격한 데가 여기밖에 없어서.”     


아... 우린 서로 민망한 듯 웃었다.


“저도 남기자님처럼 영화를 좋아했어요. 특히 공포영화.”

“으... 난 공포영화, 특히 피범벅 영화 같은 거 싫어.”     


현팀장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하는 데 반해 남기자는 눈을 빛냈다.      


“엇! 저도 좋아하는 장릅니다.”

“진짜요? 그럼 <이블데드> 봤어요?”

“당연하죠! 저예산 공포영화의 명작 아닙니까?”

“오!”     


내가 ’하이파이브‘ 하듯 손바닥을 내밀자 그가 짝소리 나게 마주쳤다. 킥킥 웃는 우리를 한심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현팀장. 이런 술자리라면 얼마든지 좋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나갔던 부장기자가 혼자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나와 현 팀장 사이를 억지로 떼어놓는 것처럼 가운데에 턱 자리를 잡았는데. 현팀장은 순간 얼굴을 찌푸렸지만 곧바로 미소를 띠었다.       


“장대표는 바쁘다고 갔어. 자자, 이제 눈치들 볼 필요 없으니까 마셔!”      


부장기자가 나와 현팀장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남기자와 더 수다를 떨고 싶었는데 웬 훼방꾼이란 말인가. 현팀장이 눈치를 줘서 마시고 싶지 않은 술을 억지로 마셨다.  

남기자의 표정이 불편해 보이는데 내 착각인가?

술잔이 여러 번 비워질수록 나보다 술이 약한 현팀장의 혀가 점점 꼬이기 시작했다. 평소에 완벽한 척하는 사람이라 술에 취하니 꽤 귀여워 보였다. 그때였다.  


“우리 진미래씨는 고향이 부산인가? 사투리 섞인 말투가 귀엽네.”      


부장기자의 입김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달라붙더니 내 허벅지에 손을 슥 올리는 게 아닌가!

나는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현팀장과 남기자가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대로 분위기 좋게 끝내면 안주연의 영화 포스터와 기사가 스포츠지에 대문짝만하게 실릴 예정이었다. 영화홍보를 위해 다들 얼마나 고생하는데, 내 허벅지가 뭐가 그리 중하다고 이 상황에서 재를 뿌린단 말인가.

얼굴빛이 변한 채 섰다가 다시 털썩 앉는 나를 본 남기자가 현팀장에게 뭔가를 속삭였다.        

더욱 가까이 달라붙는 부장기자가 역겨웠지만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시계만 쳐다봤다. 어느덧 새벽 2시를 향해 가고 있었는데, 집에 가고 싶은 생각만 간절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더욱 노골적으로 내 손을 잡고 주물럭거리는 게 아닌가! 이 새끼가 진짜!   

기분 나쁜 손을 확 뿌리치려는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현팀장이 술잔에 든 술을 부장기자의 허벅지에 확 부어버리는 게 아닌가!      


“헉! 뭐야!!”

“어머, 어머 어머! 부장님, 죄송합니다! 술을 드리려다가 그만...”

“에이 씨...”     


현팀장이 술을 닦아주려고 하자 기분 나쁜 얼굴로 홱 뿌리치는 부장기자.

이때 마담이 향수 냄새를 잔뜩 흩뿌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나이스 타이밍! 마담이 마치 구세주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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